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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 스가키요
2019년 1월
-원작 배경(28권 시점)
-1월 6일 시미즈 생일축하
이불에서 빼꼼 나온 얼굴이 조금 간격을 두고 차려진 다른 이부자리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베개에 마구 비볐던 옆머리는 헝클어졌고 이 끝으로 잘근잘근 물어댔던 아랫입술엔 흐릿한 자국이 남았지만, 눈꼬리와 입매에 달려있던 미소는 거의 지워져 있었다. 방 안은 아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옆자리의 다른 여자아이는 오늘 하루가 고단했는지 세상모르고 잠들어있었다. 여자아이는 소리 없이 일어나 얇은 겉옷 하나를 들고는 신중하게 문을 밀었다.
“쉿!” 서로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조용히 하라는 경고부터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접선했다. 얽히는 손이 서로의 소매를 잡으며 닫혀있는 문 쪽으로 몸을 이끈다. 탁, 하고 작게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숨죽인 시선이 마주쳤다. 시미즈의 눈이 방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손이 닿아있던 팔꿈치를 잡고 붙박이 이불장 쪽으로 이끈 것은 스가와라였다. 거의 무릎으로 착지하며 앉았지만 안에 있던 두꺼운 담요가 받아주어서 충격은 없었다. 시미즈가 앉으면서 스쳐 간 팔의 감각이 외려 더 선명했다. “혹시 모르니까 벽장 문은 조금 열어두자.”
“찬성이야.”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채려면 그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다 닫지 않은 미닫이문 틈으로 방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불안 요소들을 체크했다. “방문은 꼭 닫았어.”
“캄캄한데도 꽤 눈에 들어오네. 이 방은 우리 방보다 밝은걸.”
“옆 건물에서 오는 빛인가 봐. 여기가 건물 제일 끝이잖아.”
스가와라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잠깐, 그럼 이 벽장은… 어느 방 쪽으로 붙어있어?”
“우리 방 옆방이야. 비어있는 제일 작은 방.”
“아…” 시미즈가 확신을 갖고 말했다. “나랑 히토카가 쓰는 끝방이 한 칸 너머니까 우리가 여기서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 정도는 아무한테도 안 들릴 거야. 히토카는 피곤했는지 목욕하고서 곧바로 잠들어 버렸어. 괜찮아.” 좁은 공간에서 마침내 두 얼굴이 마주 보았다. “……”
“…….” 풋, 하고 웃음이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시미즈는 소리죽여 쿡쿡 웃으며 여전히 자신의 왼쪽 팔꿈치께를 잡고 있는 스가와라의 팔을 여러 번 두드렸다. 후, 하고 숨을 돌린 시미즈가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시간에 보고 싶다고 한 건 키요코잖아.” 스가와라가 역시 웃음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 부원의 정신적 지주인 수석 매니저님의 남자친구 되기란 이렇게 고된 일이었다. 여자친구인 시미즈뿐만 아니라 스가와라 자신 역시 책임과 우정과 기타 이것저것으로 눈치가 보이는 부주장의 지위에 있다는 것도 두 사람 사이를 주변에 비밀로 한 이유였지만, 전교의 마돈나 시미즈가 아닌 그냥 배구부 내 3학년 선배들끼리의 교제이기만 했다면 이렇게 스파이처럼 몰래 만나거나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연기하며 지내야 하진 않았겠지 하는 것이 그의 평소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 년에 하루뿐인 생일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시미즈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날짜가 바뀌는 순간 날려 보낸 메일은 당연히 시미즈가 봐주길 바라고 한 일이었지만, 실행한 스가와라조차 여자친구가 그렇게 즉시 답장을 보내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내용이 바로(부 활동 때문에 상경해 낯선 여관에서 단체숙박 중인 때에) 지금 당장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말이라는 것도. “안 자고 있었어?” 봄 고교배구대회 일정 한 가운데였다. 대회 스케줄이 나오고 카라스노고등학교 남자배구부가 현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부터 분명했던 사실이지만, 미야기에서 도쿄로 올라와 대회 이틀째 일정을 치르게 되는 날이 바로 오늘 즉 시미즈 키요코의 생일날이었다. 시미즈의 그 말에는 내일의 2회전을 위해 만전을 기하고 있어야 할 밤에 무슨 딴눈을 팔고 있느냐는 질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다가 일어났어.”
“거짓말.”
“11시 57분에 알람 맞춰두고.” 시미즈는 잠시 말을 잃었다. “진동 때문에 눈 떴는데, 글쎄 전화가 목 뒤쪽에서 울리고 있지 뭐야. 만약 못 일어나고 그대로 계속 잤다면 척수에 뭐가 연결된 뭐시기 SF영화 같은 꿈을 꿨을 거야.”
“…”
“뒷목에 저걸 깔고서도 그렇게 잘 잤을 정도면 이제 돌아가서 편히 누우면 아침까지 익스프레스 꿀잠이겠지. 다른 녀석들한테 비할 건 아니지만 나도 오늘 꽤 힘들었나 봐.” 계속 속삭이다 스가와라의 목이 조금 잠겨 들 때까지도 시미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짧은 정적에, 스가와라는 찔끔해서 시미즈의 눈치를 살폈다. “키요코도 피곤했지?”
“…응.” 머리 위 선반을 피해 양팔을 바닥에 짚어서 자세를 낮추고 있던 시미즈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지더니, 시미즈가 스가와라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스가와라는 이쪽으로 무게가 더 실려 오기를 기대하며 슬며시 자세를 바꿨다. 따끈따끈한 이마 아래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마워.”
“나도.” 두꺼운 담요에 파묻힌 허리를 바로 세우려 잠시 낑낑댄 스가와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세상에서 오직 시미즈 한 사람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였다. “생일 축하해, 키요코.” 시미즈는 아까 이불 속에서 혼자 그럴 수 있었던 것처럼 온 마음을 기쁨으로만 가득 채우고 좋아할 수는 없었다. 목마른 가슴이 팔을 움직였다. 손끝에 어둠 속에 가만히 놓인 다른 손이 닿았다.
쭈뼛쭈뼛 고개를 든 시미즈가 말했다. “말로만?”
“으, 응?” 예상치 못한 시미즈의 말에 목소리가 크게 튀었다. 스가와라는 지레 혼자 놀라 한 손으로 입가를 눌렀다. 시미즈의 손이 쫓아 올라와 그 손을 잡았다. 시미즈가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어… 으음, 대회고 해서, 나……아무것도 못 가져왔어. 선물을 살까 생각도 했는데 요즘 계속 시간도 없었고 뭘 선물하면 좋을지 좋은 생각도 안 들고 그래서… 우리 시험 끝나면 따로 보기로 했잖아? 그때 같이 적당한 걸 고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대회나 수험하고 관계없는 걸 여기까지 가지고 왔다고 하면 내가 먼저 화가 났을 거야.” 스가와라는 입을 다물었다. 시미즈가 잡고 있던 손에 손가락을 얽어왔다.
짜릿했다. “몸으로 때워.” 그 말과 함께 입술이 겹쳐졌다. 조용히 오가던 숨 사이를 억지로 가르고 쉿- 하는 소리가 또 앞서 나왔다. 동시에 스가와라가 입술 앞으로 검지를 세웠다. 어디가 소란스럽다고 이 정적에다 괜한 으름장을 놓는지, 시미즈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스가와라의 두 뺨을 잡았다. “뭐가 쉿-이야.”
“…키요코 손이 안 조용하니까.” 손뿐이냐, 라는 말을 스가와라는 탄식과 함께 속으로 삼켰다. 덮쳐온 입술을 시작으로 시미즈의 온몸이 스가와라에게 기대어왔다. 거기에 등 뒤는 쌓아둔 담요 더미로 푹신했다. 머리가 어질해지는 순간이었다. 만약 감촉이 소리였다면 스가와라는 방금 이 벽장 안에서 건물 안의 사람을 다 깨우고 말았을 것이다. 스가와라는 시미즈의 어깨를 굳게 잡아 안아 자신의 상반신에서 떼어내고 그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방금은 경기 앞두고 잠 안 자는 선수를 혼내려고 하지 않았어요, 매니저님? 아주 안 재울 기세로 이러는 게 어딨어.” 그렇게까지 말하자 시미즈도 드는 생각이 있었는지, 몸을 떼었다. 너무 오래 끌면 아무 것도 좋을 것이 없었다. 이러다 내년 치 생일축하까지 미리 하게 되기 전에 빨리 벽장 탈출과 잠자리로의 귀환을 생각해야 했다. 벽장문에 붙은 스가와라에게 시미즈가 말했다. “그게 되기는 하고?” 스가와라의 팔이 벽장문에서 미끄러졌다. “그런 말이 있었지…. 시험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떠보는 거 아니야, 저기…”
“절대 안 돼. 안돼요. 안됩니다요. 스포츠과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양심적으로도 안 돼. 안 해.” 딱 잘라 쳐내면서도 신체적으로 기능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 스가와라였다. “목소리 조금 작게.”
“키요코, 내가 좀 침착하게 말할 수 있는 주제를 골라줄래?” 뾰족하게 되물으면서도 말이 끝날 때쯤 스가와라의 목소리는 다시 그럭저럭 속삭임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 진짜로 아무것도 안 가져왔단 말이야…. 내가 도쿄까지 관계없는 걸 챙겨왔음 화낼 거라고 했으면서.” 그제서야 시미즈도 정신을 차린 듯 “미안.” 하며 사과해왔다. “미안할 거 없어.”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것도 없어.” ‘일어나기 전에 바지는 좀 고쳐 입어야겠지만.’
괜찮았다. 오늘이 1년에 한 번 오는 여자 친구의 생일이라도, 고교생활 3년을 바쳐 얻어낸 단 한 번의 전국대회라도, 평소대로 늘상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행동하고 또 생각하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다. 매일 해왔듯이 달리며 웜업을 하고, 친구와 시시덕대고, 저녁 먹은 뒤엔 문제풀이와 오답정리를 이른 아침엔 단순암기를 하고, 열심히 배구를 하고,
‘너를 사랑하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화끈한 밀회로 잠이 달아났을 법도 했지만, 별것 아닌 일로 열을 내고 나니 스가와라는 잠과 안식이 고팠다. 낮에 적잖이 피곤했던 건 시미즈도 마찬가지였던지라 둘의 의견은 모였다. 일단 방이 가까운 시미즈가 먼저 나서고, 복도에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이부자리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면 스가와라가 시간 차를 넉넉히 두고 나가기로 했다.
붙박이장을 나서기 전, 시미즈가 말했다. “아쉬우니까 마지막으로.”
“뽀뽀 한 번만?”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가볍게 입술을 붙이는 그녀에게, 스가와라는 다시 한번 소리 없는 축하를 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성급하고, 가장 여리고, 또 가장 큰 마음을.
2019년 1월
-원작 배경(28권 시점)
-1월 6일 시미즈 생일축하
1월의 밤은 조용했다. 두꺼운 창 너머로 진동하는 겨울바람이나, 넓은 다다미 방을 채운 작은 숨소리는 오히려 공간을 삭막한 무음의 상태로부터 건져내어 딱 적당한 정도의 고요로 느껴지게 했다.
“삐리릭-” 이불 속에서 스르르 나온 손이 재빨리 작은 휴대전화를 잡았다. 베개에 옆머리를 대는 자세로 고쳐 누워 눈을 가늘게 뜬 여자아이는 불이 켜진 전화기에 떠 있는 숫자를 보고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12:00 N 밤 12시 정각을 알리는 그 숫자판은 그들이 잠자리에 든지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위아래로 접혀있던 기계가 손끝에 눌려 팔락하고 펼쳐졌다. 열린 전화기에서 나온 불빛이 살짝 벌어진 입술과 감긴 눈을 비춘다. 화면이 쏘아내는 빛에 적응한 눈이 표시 아이콘을 읽어냄과 동시에 손가락이 익숙한 동작으로 버튼 몇 개를 연달아 눌렀다. 나타난 새 화면에 문장이 떠올랐다. “아….”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진 또 다른 시간 표시. 2013년 1월 6일 일요일 00:00:00 탄성처럼 숨을 뱉어낸 입술이 다물린다. 전화기의 빛이 나는 화면을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로 눌러 빛을 죽인 사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 부스럭 소리가 났다. 웅크린 형체는 몇 초간 조용하다가, 전화기를 잡은 손만 불쑥 움직였다. 잠시 뒤.이불에서 빼꼼 나온 얼굴이 조금 간격을 두고 차려진 다른 이부자리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베개에 마구 비볐던 옆머리는 헝클어졌고 이 끝으로 잘근잘근 물어댔던 아랫입술엔 흐릿한 자국이 남았지만, 눈꼬리와 입매에 달려있던 미소는 거의 지워져 있었다. 방 안은 아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옆자리의 다른 여자아이는 오늘 하루가 고단했는지 세상모르고 잠들어있었다. 여자아이는 소리 없이 일어나 얇은 겉옷 하나를 들고는 신중하게 문을 밀었다.
“쉿!” 서로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조용히 하라는 경고부터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접선했다. 얽히는 손이 서로의 소매를 잡으며 닫혀있는 문 쪽으로 몸을 이끈다. 탁, 하고 작게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숨죽인 시선이 마주쳤다. 시미즈의 눈이 방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손이 닿아있던 팔꿈치를 잡고 붙박이 이불장 쪽으로 이끈 것은 스가와라였다. 거의 무릎으로 착지하며 앉았지만 안에 있던 두꺼운 담요가 받아주어서 충격은 없었다. 시미즈가 앉으면서 스쳐 간 팔의 감각이 외려 더 선명했다. “혹시 모르니까 벽장 문은 조금 열어두자.”
“찬성이야.”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채려면 그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다 닫지 않은 미닫이문 틈으로 방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불안 요소들을 체크했다. “방문은 꼭 닫았어.”
“캄캄한데도 꽤 눈에 들어오네. 이 방은 우리 방보다 밝은걸.”
“옆 건물에서 오는 빛인가 봐. 여기가 건물 제일 끝이잖아.”
스가와라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잠깐, 그럼 이 벽장은… 어느 방 쪽으로 붙어있어?”
“우리 방 옆방이야. 비어있는 제일 작은 방.”
“아…” 시미즈가 확신을 갖고 말했다. “나랑 히토카가 쓰는 끝방이 한 칸 너머니까 우리가 여기서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 정도는 아무한테도 안 들릴 거야. 히토카는 피곤했는지 목욕하고서 곧바로 잠들어 버렸어. 괜찮아.” 좁은 공간에서 마침내 두 얼굴이 마주 보았다. “……”
“…….” 풋, 하고 웃음이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시미즈는 소리죽여 쿡쿡 웃으며 여전히 자신의 왼쪽 팔꿈치께를 잡고 있는 스가와라의 팔을 여러 번 두드렸다. 후, 하고 숨을 돌린 시미즈가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시간에 보고 싶다고 한 건 키요코잖아.” 스가와라가 역시 웃음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 부원의 정신적 지주인 수석 매니저님의 남자친구 되기란 이렇게 고된 일이었다. 여자친구인 시미즈뿐만 아니라 스가와라 자신 역시 책임과 우정과 기타 이것저것으로 눈치가 보이는 부주장의 지위에 있다는 것도 두 사람 사이를 주변에 비밀로 한 이유였지만, 전교의 마돈나 시미즈가 아닌 그냥 배구부 내 3학년 선배들끼리의 교제이기만 했다면 이렇게 스파이처럼 몰래 만나거나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연기하며 지내야 하진 않았겠지 하는 것이 그의 평소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 년에 하루뿐인 생일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시미즈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날짜가 바뀌는 순간 날려 보낸 메일은 당연히 시미즈가 봐주길 바라고 한 일이었지만, 실행한 스가와라조차 여자친구가 그렇게 즉시 답장을 보내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내용이 바로(부 활동 때문에 상경해 낯선 여관에서 단체숙박 중인 때에) 지금 당장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말이라는 것도. “안 자고 있었어?” 봄 고교배구대회 일정 한 가운데였다. 대회 스케줄이 나오고 카라스노고등학교 남자배구부가 현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부터 분명했던 사실이지만, 미야기에서 도쿄로 올라와 대회 이틀째 일정을 치르게 되는 날이 바로 오늘 즉 시미즈 키요코의 생일날이었다. 시미즈의 그 말에는 내일의 2회전을 위해 만전을 기하고 있어야 할 밤에 무슨 딴눈을 팔고 있느냐는 질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다가 일어났어.”
“거짓말.”
“11시 57분에 알람 맞춰두고.” 시미즈는 잠시 말을 잃었다. “진동 때문에 눈 떴는데, 글쎄 전화가 목 뒤쪽에서 울리고 있지 뭐야. 만약 못 일어나고 그대로 계속 잤다면 척수에 뭐가 연결된 뭐시기 SF영화 같은 꿈을 꿨을 거야.”
“…”
“뒷목에 저걸 깔고서도 그렇게 잘 잤을 정도면 이제 돌아가서 편히 누우면 아침까지 익스프레스 꿀잠이겠지. 다른 녀석들한테 비할 건 아니지만 나도 오늘 꽤 힘들었나 봐.” 계속 속삭이다 스가와라의 목이 조금 잠겨 들 때까지도 시미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짧은 정적에, 스가와라는 찔끔해서 시미즈의 눈치를 살폈다. “키요코도 피곤했지?”
“…응.” 머리 위 선반을 피해 양팔을 바닥에 짚어서 자세를 낮추고 있던 시미즈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지더니, 시미즈가 스가와라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스가와라는 이쪽으로 무게가 더 실려 오기를 기대하며 슬며시 자세를 바꿨다. 따끈따끈한 이마 아래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마워.”
“나도.” 두꺼운 담요에 파묻힌 허리를 바로 세우려 잠시 낑낑댄 스가와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세상에서 오직 시미즈 한 사람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였다. “생일 축하해, 키요코.” 시미즈는 아까 이불 속에서 혼자 그럴 수 있었던 것처럼 온 마음을 기쁨으로만 가득 채우고 좋아할 수는 없었다. 목마른 가슴이 팔을 움직였다. 손끝에 어둠 속에 가만히 놓인 다른 손이 닿았다.
쭈뼛쭈뼛 고개를 든 시미즈가 말했다. “말로만?”
“으, 응?” 예상치 못한 시미즈의 말에 목소리가 크게 튀었다. 스가와라는 지레 혼자 놀라 한 손으로 입가를 눌렀다. 시미즈의 손이 쫓아 올라와 그 손을 잡았다. 시미즈가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어… 으음, 대회고 해서, 나……아무것도 못 가져왔어. 선물을 살까 생각도 했는데 요즘 계속 시간도 없었고 뭘 선물하면 좋을지 좋은 생각도 안 들고 그래서… 우리 시험 끝나면 따로 보기로 했잖아? 그때 같이 적당한 걸 고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대회나 수험하고 관계없는 걸 여기까지 가지고 왔다고 하면 내가 먼저 화가 났을 거야.” 스가와라는 입을 다물었다. 시미즈가 잡고 있던 손에 손가락을 얽어왔다.
짜릿했다. “몸으로 때워.” 그 말과 함께 입술이 겹쳐졌다. 조용히 오가던 숨 사이를 억지로 가르고 쉿- 하는 소리가 또 앞서 나왔다. 동시에 스가와라가 입술 앞으로 검지를 세웠다. 어디가 소란스럽다고 이 정적에다 괜한 으름장을 놓는지, 시미즈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스가와라의 두 뺨을 잡았다. “뭐가 쉿-이야.”
“…키요코 손이 안 조용하니까.” 손뿐이냐, 라는 말을 스가와라는 탄식과 함께 속으로 삼켰다. 덮쳐온 입술을 시작으로 시미즈의 온몸이 스가와라에게 기대어왔다. 거기에 등 뒤는 쌓아둔 담요 더미로 푹신했다. 머리가 어질해지는 순간이었다. 만약 감촉이 소리였다면 스가와라는 방금 이 벽장 안에서 건물 안의 사람을 다 깨우고 말았을 것이다. 스가와라는 시미즈의 어깨를 굳게 잡아 안아 자신의 상반신에서 떼어내고 그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방금은 경기 앞두고 잠 안 자는 선수를 혼내려고 하지 않았어요, 매니저님? 아주 안 재울 기세로 이러는 게 어딨어.” 그렇게까지 말하자 시미즈도 드는 생각이 있었는지, 몸을 떼었다. 너무 오래 끌면 아무 것도 좋을 것이 없었다. 이러다 내년 치 생일축하까지 미리 하게 되기 전에 빨리 벽장 탈출과 잠자리로의 귀환을 생각해야 했다. 벽장문에 붙은 스가와라에게 시미즈가 말했다. “그게 되기는 하고?” 스가와라의 팔이 벽장문에서 미끄러졌다. “그런 말이 있었지…. 시험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떠보는 거 아니야, 저기…”
“절대 안 돼. 안돼요. 안됩니다요. 스포츠과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양심적으로도 안 돼. 안 해.” 딱 잘라 쳐내면서도 신체적으로 기능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 스가와라였다. “목소리 조금 작게.”
“키요코, 내가 좀 침착하게 말할 수 있는 주제를 골라줄래?” 뾰족하게 되물으면서도 말이 끝날 때쯤 스가와라의 목소리는 다시 그럭저럭 속삭임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 진짜로 아무것도 안 가져왔단 말이야…. 내가 도쿄까지 관계없는 걸 챙겨왔음 화낼 거라고 했으면서.” 그제서야 시미즈도 정신을 차린 듯 “미안.” 하며 사과해왔다. “미안할 거 없어.”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것도 없어.” ‘일어나기 전에 바지는 좀 고쳐 입어야겠지만.’
괜찮았다. 오늘이 1년에 한 번 오는 여자 친구의 생일이라도, 고교생활 3년을 바쳐 얻어낸 단 한 번의 전국대회라도, 평소대로 늘상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행동하고 또 생각하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다. 매일 해왔듯이 달리며 웜업을 하고, 친구와 시시덕대고, 저녁 먹은 뒤엔 문제풀이와 오답정리를 이른 아침엔 단순암기를 하고, 열심히 배구를 하고,
‘너를 사랑하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화끈한 밀회로 잠이 달아났을 법도 했지만, 별것 아닌 일로 열을 내고 나니 스가와라는 잠과 안식이 고팠다. 낮에 적잖이 피곤했던 건 시미즈도 마찬가지였던지라 둘의 의견은 모였다. 일단 방이 가까운 시미즈가 먼저 나서고, 복도에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이부자리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면 스가와라가 시간 차를 넉넉히 두고 나가기로 했다.
붙박이장을 나서기 전, 시미즈가 말했다. “아쉬우니까 마지막으로.”
“뽀뽀 한 번만?”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가볍게 입술을 붙이는 그녀에게, 스가와라는 다시 한번 소리 없는 축하를 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성급하고, 가장 여리고, 또 가장 큰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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