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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파트는 잘라낸 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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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 스가키요
2016년 7월
-원작 기반
-고백 거절, 호우, 부실, 스타킹, (19금)
 

"스가와라, 좋아해."
맑은 날이었다. 해는 기울기 시작해 따갑던 햇볕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주택의 낮은 지붕 사이로 저 멀리 산의 나무들이 바람에 이파리를 흔들며 춤 추는 것이 보였다.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맑은 마음 속에 고여있던 명쾌한 것이 자기도 모르게 표면으로 스며나올 만큼.

시미즈 키요코는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가끔 겹치던 둘만의 하교길, 골목을 빠져나오면 맞닥뜨리게 되는 공터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점심 때 내렸던 소나기는 땅을 살짝 적시고 사라졌기에 흙이 드러난 발밑은 단단했다. 대신 대기에 약간의 습기가 남아있어 숨 쉬기가 편했다. 그 풍경 속의 그녀 또한 아름다웠다. 촉촉한 햇살 속에 윤곽이 부서진 그녀의 모습은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처럼 보였다.
스가와라는,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침착하게 간격을 세며 '미안하다'와 '고맙다' 중에서 그녀에게 먼저 돌려줄 말을 골랐다.

"미안해, 시미즈."

거절의 말 가운데 선택받은 것은, 보다 심플한 쪽.

"마음은 고맙지만, 난 받아들일 수 없어."

시미즈가 살짝 고개를 떨어트렸다. 손 댈 수 없을 것 같던 아름다운 그림이 떨리며 깨져나간다. 스가와라도 시선을 돌렸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침내 스가와라가 "그럼," 하고 입을 떼자, 시미즈는 굳어버렸다.

"…이대로 계속, 같이 가는 것도 그렇지?

"응…"하는 소리를 입 안으로 삼키며 그 자리에서 스가와라를 보내려던 시미즈에게, 스가와라가 짐짓 목소리를 키우며 말했다.

"먼저, 가줄래?"

그녀가 살며시 얼굴을 들었다. 의심하듯이 던진 그 시선 끝에서 스가와라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여기 시미즈를 혼자 남겨두고 가기는 싫어서 그래."

일부러 명랑하게 만든 그 말투와 미소에 고마워하면서도 역시 고맙다는 말만은 할 수가 없었는지, 그녀는 고개만 한번 끄덕여 보이고 발을 옮겼다.
돌아서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약간 맺혀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시미즈의 모습이 골목 안으로 사라지려 하던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쏴 하고 벌레 울음이 쏟아졌다. 마치 두 사람의 순간이 끝나기를 기다려주기라도 한 듯이. 소년은 긴장이 풀려 맥빠진 한숨을 뱉었다.
그 날이 그가 그 해 여름의 마지막 말매미 소리를 들은 날이었다.


건물을 나서고 몇 발짝 걷지도 않았는데 신발 속의 발끝이 완전히 젖었다. 굵은 빗줄기가 활짝 편 우산 위를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사정없이 때리는 통에 우산대를 꼭 잡고 있던 팔이 휘청할 정도였다. 물줄기를 줄줄 떨어트리는 우산 살 밑으로 올려본 하늘은 누군가 휘저어놓은 것처럼 뒤죽박죽으로 섞인 검은 먹빛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빗줄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남쪽 바다를 지나는 때늦은 태풍의 영향이었다. 조마조마하게 혼슈 상륙 여부를 점치던 며칠 전보다야 전망이 나았지만, 본격적으로 영향권에 들어선 오늘 미야기를 비롯한 도호쿠 대부분 지역에는 호우주의보가 내렸다. 오후의 학교엔 인적이 없었다. 평소라면 학생들의 활달한 기척으로 가득했을 교정은 이미 빗줄기들의 놀이터였다. 건물 벽을 타고 내려온 배수관이 끝나는 곳마다 쏟아진 물의 힘으로 흙이 푹 파였다. 당초엔 정상수업이 가능하다 여겨졌지만, 점심 무렵부터 거세어진 비바람에 학교 측은 학생들에게 일찌감치 귀가할 것을 당부했다. 아침 나절 우산에 맺힌 부슬비와 함께 가볍게 등교했던 아이들은 일찍 끝난 수업을 기뻐할 여력도 없이 장대비를 견디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교해야 했고, 지금은 그나마 빗줄기가 약했던 그 타이밍에 나가지 못한 소수의 학생과 교직원만이 어두침침한 교사 안에 남아서 물폭탄 수준이 되버린 빗발이 조금이라도 약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체육관 앞에서 우산 쓴 인영을 발견한 것은 정말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우산 아래로 보인 모습이, 서로에게 익숙한 얼굴이었기에 더더욱.

"스가와라!"
"…시미즈!"

거친 빗소리에 목소리가 묻히고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그럭저럭 이야기가 가능했다. 스가와라가 말했다.

"집에 안가고 여태 뭐했어? 괜찮아?"
"스가와라야말로. 안보여서 먼저 간줄 알았는데?"

평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시미즈가 모처럼 톤을 올려 말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크게 들리지가 않는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등으로 물줄기가 파팍, 튀었다. 그 차가움에 눈을 찡그리며 스가와라는 대답했다.

"요즘 부실 창문을 안 잠그고 다녔던 것 같아서 보러… 시미즈는?"
"체육관에…."

"하하." 하고, 스가와라는 살짝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흘렸다. 결국 생각하는 건 다들 비슷하구나 싶었다. 봄철대회의 현 대표 결정전이 눈 앞이다. 단 한 명의 부상도 용납할 수 없다며 부원들에게 일일히 연락해 오늘은 연습보다 무사히 귀가하는 것만을 생각하라고 밀어붙이던 다이치도, 혹시라도 비가 들이쳐 부실이 망가질까봐 다시 올라온 자신도, 내일이나 모레면 다시 연습을 이어가야 할 체육관 상태를 걱정해 이런 기상에도 남아서 살핀 시미즈도, 모두가 온 마음으로 하나만을 신경쓰고 있었다.
다시 바람 방향이 바뀌었다. 스가와라가 들고 있던 3단 우산이 순간 뒤집혔다가 다시 원래대로 꺾였다. 키요코의 안경에도 물이 튀었다. 우산을 치는 비바람의 진동이 손에, 어깨에, 그대로 전달되어 온다.

"안되겠어!"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부실로 돌아가자!"

이런 날씨에 야외에서 계속 담소를 나눌 여유는 없다. 두 사람은 제일 가까운 부실동 건물 아래로 달려들어갔다. 머리 위가 막힌 곳으로 가자 한결 나았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듯 우산을 든 손을 아래로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멀리서 휘유우웅하고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굉장하네."

키요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짜."

다음 순간, 건물 사이로 들어온 돌풍에 위에서 아래로 내리던 빗줄기가 위에서 옆으로, 후두둑하고 일제히 처마 아래로 들이쳐왔다. 건물 위에서 줄줄 떨어져내리던 물줄기도 한번에 방향을 꺾어 이쪽으로 떨어져 튀긴다. 이제 처마 밑에서 쉬고 있을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시미즈, 준비 됐어?"

입을 열자 빗방울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키요코도 각오를 다진 얼굴로 대답했다.

"좋아."
"올라가자."

둘은 다시 우산을 쓰고, 머리 위가 가려진 곳을 벗어나 2층의 남자 배구부 부실로 가는 계단을 재빨리 올라갔다. 철제 계단이 미끄러웠다. '조심하지 않으면-' 하고 생각한 그 순간, 키요코의 발 아래서 삐익! 하는 소리가 났다.

"위험해!"

스가와라의 손이 비틀대던 키요코의 팔을 굳게 잡았다. 키요코의 상체가 난간 밖으로 기울어지던 참이었다. 스가와라가 재빨리 잡아주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서자, 물을 잔뜩먹은 여학생용 로퍼가 오른발에서 반쯤 벗겨져 있었다. 키요코는 삼켰던 숨을 겨우 내쉬며 어깨 너머로 넘어가려는 우산을 잡아 올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선 느낌이 슬슬 진정되었을 때, 심장은 오히려 더 거세게 뛰기 시작한 것을 깨달았다. 팔을, 어깨를 강하게 감싼 스가와라의 손이 느껴졌다. 폭우에 정신이 달아나 크게 의식하지 못했지만 거절 당한 그 고백 이후 단 둘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 적도. 그것을 자각하자 뺨이 주체할 수 없이 달아올랐다.

"시미즈. 우산."
"아, 응…"

굳어있던 그녀가 겨우 고개를 들자, 눈 앞에 평소와 같은 스가와라가 있었다. 아니,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언제나처럼 다정하던 그의 얼굴은 이 비 내리는 날씨처럼, 서늘하게 식은 표정이 되었다. 이건 분명히

'알고 있는' 표정이다.

"어서 가자, 발 밑은 계속 조심하고."

그 말을 남기고 스가와라는 다시 앞장서 계단을 올랐다. 키요코는 그 등을 올려보며 얼굴을 붉혔다. 귓속이 뜨거웠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배려를 받은 것뿐인데도 좋아하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을 의식해버린 자신이 부끄럽고, 그것을 스가와라가 알아채버린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잦아들 생각이 없는 가슴의 두근거림이 제일 부끄러웠다.
또다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히 걸음을 떼며 2층에 도달하자, 스가와라는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부실문을 여는 중이었다. 스가와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안으로 사라졌다. 우산을 접고서 뒤따른 키요코가 부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등 뒤에서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바람에 닫혔다.

키요코는 깜짝 놀라 귀를 감쌌지만 이내 바람도 비도 없이 조용한 부실에서 마음이 진정됨을 느꼈다. 어둑한 실내와 습기 어린 냄새가 오히려 아늑했다. 바깥과 달리 이 공간은 안정되어 있었다. …키요코에게만은 절대로 마음 편하지 않은, 단 하나의 예외를 뺀다면.
먼저 부실에 들어선 스가와라는 이미 운동화를 입구에 툭툭 벗어두고 부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캐비닛을 열더니 안에서 여분의 스포츠타월을 꺼내 흠뻑 젖은 옆머리와 목을 닦고는, 다른 한 손의 타월을 키요코를 향해 "자." 하고 던진다. 접혀있던 타월이 공중에서 펼쳐져, 앞으로 내민 키요코의 손에 걸렸다.

"고, 고마워…."

키요코는 자기도 모르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고 다다미 위에 발끝으로 올라섰다. 비에 흠뻑 젖은 로퍼는 세워서 문 옆에 기대놓았다. 스가와라는 그새 양말을 벗고 있었다. 맨발이 된 스가와라는 젖은 양말을 창문 아래에 길게 널어놓고서 재킷을 벗어 손으로 물기를 툭툭 털다가, 문간에 선 키요코를 슥 보고는 말했다.

"벗는 게 좋지 않겠어? 양말…"

"아니, 스타킹…."하고 말미를 흐리는 그 목소리를 이해하자 키요코의 귓불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피부에 나쁘다구. …시미즈도 혹시 알아? 예전에 다이치가 연습 끝내고 벗어놨던 양말이 부실 안에서 행방불명됐다가…"

확실히 그건 키요코도 아는 일이었다. 실종되었던 사와무라의 양말 한 짝은 머금고 있던 적당한 습기와 실내의 온도 덕에 일주일 후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고, 결국 선배들이 폐기물처리봉투를 구하러 가겠다고 나설 정도의 소란으로 번졌으니까. 그때의 참상을 떠올리며 망설이다 "그럼…" 하며 입을 뗀 스가와라의 얼굴로 눈을 옮겼을 때

내가 벗겨줄까?

…라는 말을 들은 것만 같아서, 키요코는 두 뺨을 굳혔다. 이상했다. '스가와라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인데.'

"…뒤돌아있을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그의 등에 홀린듯이, 다음 순간 키요코는 순순히 치마 아래로 스타킹을 벗어 내리고 있었다.

젖은 스타킹이 이미 체온에 데워져 있었는지 다리를 감싸오는 공기가 새삼스레 차가웠다. 다다미의 요철이 발가락 끝에 감겨들었다. 손에 든 스타킹의 느낌이 어딘지 찜찜해 한번 물기를 짜볼까 싶어 그녀는 신발을 벗어둔 쪽으로 몸을 돌리며 웅크렸다. 그러자-

등을 보이고 있을 줄 알았던 스가와라가, 이미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등줄기에 돋는 소름과 함께 키요코의 귓가에는 다시 열기가 피어올랐다. 스가와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거봐. 발가락이 쪼글쪼글해졌잖아."

하고 말하더니 태연히 다가왔다. 키요코의 팔에서 수건을 뺏어든 그가 그녀 앞에 마주 앉았다. 수건을 든 그의 손이 그녀의 다리로 가까워져 온다. 수건이 다리를 감싼다. 키요코는 조용히 무너져,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시간은 아직 낮이었지만 불을 켜지 않은 실내는 바깥 하늘을 반영해 어두침침했다. 그 회색 풍경 가운데 빗물에 젖은 키요코의 다리만이 백열하듯이 희게 빛났다. 신발 속에서 물을 잔뜩 먹은 발끝은 투명하게까지 보였다. 그리고 스가와라는 마치 친구 돌봐주기를 좋아하는 상냥한 아이인 듯 그 발의 물기를 수건으로 찬찬히 훔쳐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얇은 수건 너머로 느껴지는 스가와라의 손길이, 키요코에겐 너무 자극적이었다. 방금 전 계단에서 그녀를 붙잡아주었던 때같은 다급함도 강한 힘도 없고 그저 부드럽고 꼼꼼할 뿐인 움직임엔 간지러운 구석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닿은 곳마다 열기가 모인다. 그녀가 용기를 내서 다리를 빼려 꿈틀거려봐도 그는

"시미즈, 가만있어 봐."

하고 나즈막히 말할 뿐 손길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확실하게 발목을 잡아채온다. 키요코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서 그녀가 잘 아는 스가와라의 얼굴을 찾았다. 그녀가 그 얼굴로부터 읽을 수 없는 표정들을 헤아리려 애쓰고 있을 때, 그녀의 다리에만 집중하고 있던 그가 눈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뜨겁다. 서늘한 얼굴에서 눈만이 뜨거웠다. 그 눈길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손가락이 닿은 발바닥 가운데가 뜨겁게 저려왔다. 세운 무릎에 힘이 들어가고, 치마 자락을 모아쥔 손끝이 갈 데를 찾지 못하고 저들끼리 꼬인다.

키요코는 그만 참을 수 없어져,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싫은 일을 견디는 작은 아이처럼 두 눈을 꼭 감고 무릎을 안은 그녀를 스가와라는 잠시 가만히 내려보다가, 고개를 깊이 숙여 얼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촉촉해 보이는 그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감촉도 소리도 너무나 선명했다. 놀란 키요코가 눈을 떴다. 움찔, 팔다리로 기며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그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쪽, 쫓아가서 다시 입맞춘다. 그녀가 또 엉거주춤 물러난다. 그도 따라간다. 쪽, 쪽. 세 번쯤 반복하자, 그녀의 등이 부실 벽을 따라선 찬장에 닿았다.

"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진 그녀의 낮은 탄식을 조금 다르게 이해했는지, 스가와라가 다정하게 손을 뻗어왔다.

"부딪혔어?"

"안되지…"하며 키요코의 뒷머리를 감싸오는 그 손이, 달아오른 목덜미에 아플 정도로 시원했다. 그대로 입술이 밀어닥쳤다.



[잘라낸 부분은 이 중간의 5000자 가량 분량입니다]


… 그녀는 이 좁고 습한 공간 안에서, 생생히 살아있었다. 서툰 섹스의 여운에 떨며 까무룩 잠들어버리려하는 이 순간조차도 그랬다.배려, 열등감, 연애감정, 체념, 초조함, 자격지심, 희생정신, 위선, 동경, 위악, 오만, 주저함, 불신, 애정, 그리고 욕정 -오늘의 하늘만큼 엉망진창인 그의 마음에 흠뻑 적셔진 채로.
심술. 그래, 심술이었다. 임시방편으로 막아놓은 저 혼탁한 감정들을 알아주지 않고 그저 올곧게 마음을 쏟아오는 그녀에게 부리는, 심술. 그래도 스가와라는 진심으로, 그녀가 그런 그를 구해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나를 구할 수 없는데 어떻게 너에게 나를 구해달라고 할 수 있을까.'

손 안에 넣고 구기기엔 너무도 부피감 있고, 두 팔로 껴안고 옥죄기엔 너무나 가는 시미즈 키요코의 몸을 품 안에 담으며 스가와라는 후회했다. 올해 들어 그의 좌절과 고민의 칸에는 '역부족' 세 글자만이 빽빽할 뿐 '최선을 다하지 않음'이나 '잘못에 대한 반성' 등은 개입할 틈이 없었기에, 그는 품 안에 날아들어온 그 모처럼의 후회를 달게 맛보았다.
혼자만의 밀회는 그러나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지붕을 때리던 빗소리가 약간 잦아든 사이로 멀리서 하교를 재촉하는 사이렌 소리가 메아리쳐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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