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하이큐 스가키요
2016년 8월
-어릴 때부터 한 성당에 다닌 소꿉친구 설정 AU
-카톨릭 신자
돌 전당에서는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려 쓸데없이 위엄있게 들린다. 키요코는 걸음걸이를 고쳐 발소리를 죽였다.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미사 전후 시간엔 전혀 신경 쓸 일 없는 소리가 지금처럼 사람이 없을 땐 괜히 키요코의 머리칼을 곤두서게 했다.
예배당 입구에 다가선 키요코는 Α와 Ω가 새겨진 중앙의 큰 문이 아닌 낮은 옆문을 밀었다. 하지만 발소리를 죽이느라 뒤꿈치에 힘을 빼고 있어서인지 안 그래도 무거운 문짝은 수월하게 열리질 않았다. 마호가니 색 나무판에 어깨를 기대고 힘껏 밀자 그제야 문이 움직였다. 열린 틈으로 서늘한 공기와 옅은 향냄새가 피어올라 얼굴을 감쌌다.
앞은 거의 어둠이었다. 키요코는 발밑을 주의하며 앞으로 나아가 돌로 된 성수대 앞에 섰다. 수반에 고인 성수를 찍은 손끝이 이마와 가슴과 왼쪽과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다시 가슴 앞에서 두 손바닥이 만나 오른쪽 엄지가 왼쪽 엄지 위로 포개진다. 키요코는 그대로 예배당 앞쪽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천장이 낮은 입구의 아치를 벗어나자 어둠은 겨우 발밑으로 물러났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깃불이 켜지지 않은 본당은 한낮에도 침침하다. 제대를 향해 걸어가는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한낮의 햇볕이 겨우 내려와 색색으로 아롱져 굴렀다.
예배당 가장자리에 다다른 키요코는 가장 가까운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성모상 앞으로 갔다. 그때 어딘가에서 찰카닥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철렁해 고개를 돌리니, 제단 옆 쪽문에서 누군가가 내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뭐해?"
김이 빠진듯한 목소리가 말했다. 키요코는 내심 마음이 편해져 맞받아쳤다.
"스가와라야말로."
동갑인 스가와라는 키요코와는 어릴 때부터 한 본당에서 알고 지낸 사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미사에서 복사服事를 했던지라 제대 옆 준비실에서 나오는 모습이 여유로웠다. 티셔츠에 편한 바지 차림을 한 스가와라는 제대를 내려와 키요코 쪽으로 곧장 다가왔다. 제단 바로 앞에서도 그 위쪽 십자가 방향으로 대충 고개만 꾸뻑 숙이고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 문에서 티셔츠 입고서 걸어 나오니까 기분 이상하다."
"평소에도 다들 티셔츠 입고 있거든요? 위에 뭘 더 걸치고 있어서 그렇지."
스가와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키요코가 이 본당에 다니기 시작한 게 5~6살 때니 고등학교 3학년, 17살인 지금은 서로 알고 지낸 지가 10년이 넘었다. 엄마 손을 잡고 성당에 오던 유치부 때부터 쭉 봐온 사이라도 서로 여자아이 남자아이다 보니, 자랄수록 어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둘이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키요코는 무척 오랜만인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데서 뭐하려고? 혼자 묵상?"
"아니. 아래에서 수산나 수녀님을 만났는데…"
어린이와 청소년부 미사에 늘 함께 하는 수산나 수녀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깜박깜빡하는 버릇이 있었다. 성모상 앞의 다 된 초를 바꿔놓으려던 것을 외출하려다 떠올리고 마침 본당 앞에서 마주친 키요코에게 대신해 줄 것을 부탁하는 바람에 키요코가 여기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비 초는 어디에 두지?"
하지만 막상 새로 초를 꺼내려니, 키요코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에게 부탁한 사람이 수산나 수녀라는 것을 이미 들었기에 스가와라는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내가 알아. 뒤에서 가져올게."
하고 다시 문 안으로 사라진 스가와라는 금세 하얀 초 두 개를 한 손에 잡고서 나타났다. 손을 내미는 키요코에게 고개를 저으며 그가 성모상 앞으로 다가섰다.
"걱정 마. 내가 초만 10년을 켰어."
가벼운 사양을 하고, 스가와라는 손을 움직였다.
미사 중에 사제를 도와 도구를 옮기거나 종을 울리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복사는 보통 어린 남자아이들이 맡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학년 아래로는 성당에 점점 아이들이 줄기만 했기 때문에, 루치아노 스가와라 코우시 군은 고등학생이 되어 주임신부님보다 키가 커질 때까지도 복사단에 들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사 전에 제대의 촛불을 켜는 일은 점화기를 다루는 것이다 보니 보통 나이 많은 아이들이 주로 맡아 했고 그중에서도 최고참인 스가와라가 제일 자주 했다. 하지만 그런 경력이 있는 것치고는 평범하게, 스가와라는 다 탄 초의 기울어진 심지에 새 초의 흰 심지를 대어 불을 옮겨붙일 뿐이었다. 애초에 미사 때 쓰는 손잡이가 긴, 금색의 멋진 점화기도 없었다. '뭘 기대한 거지.' 키요코는 시시해 하는 자신에게 물었다.
단 위가 한층 밝아지고, 곧 매끈하던 새 초의 심지 주변이 투명하게 변해 일렁이기 시작했다. 둘은 잠시 말없이 그걸 보다가 두 손을 모으고 성모상에 고개를 숙였다.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몸에 배인 예절이다. 고개를 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동시에 풋, 웃었다.
처음 만났던 무렵도 이랬다. 학교에 올라가기 전의 둘은 서로 눈이 마주치면 후후 웃는, 사이좋은 단짝이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 유치원 시절의 어느 겨울부터 시미즈 키요코는 이곳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이미 있었다. 가족과 함께 아기 때부터 다녔기 때문에, 무뚝뚝한 남자 어른들조차도 루치아노라는 세례명을 들으면 알았다. 작은 남자아이와 희게 웃는 그 얼굴을. 성당에 익숙했던 루치아노는 딱 맞는 털모자 아래로 반짝반짝한 까만 머리를 늘어트린 '키요코 쨩'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코우 쨩', 그리고 가끔 '루치아노'라고 불러주는 그 아이를 스가와라는 정말로 좋아했다.
하지만 키요코가 성당생활에 익숙해지고, 결정적으로 세례를 받게 되면서 둘 사이는 완전히 갈려버렸다. 키요코가 예비자 교리 시간에 함께 다니던 여자친구들과 완전히 친해져 버린 것이었다. 여전히 인사는 주고받았지만 이제 제일 친한 친구는 서로가 아니었다. 여자가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친하게 지내면 놀림 받는 나이였다. 소학교 고학년 때 성체성사를 받을 때는 둘이 같은 시기에 교리교육을 받았지만, 이미 서로 호칭은 '스가와라', '시미즈'가 되어있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 눈에 들었던 스가와라는 복사 일 때문에 유년부 활동에도 늘 늦기 일쑤라 말 붙일 틈도 별로 없었다.
"스가와라는 무슨 일로 와있었어?"
"음? 아 뭐…"
스가와라는 말을 흐렸다. 하지만 사람이 적은 곳에서는 말이 돌기 마련이라, 나서는 법이 없는 키요코마저도 별 대화가 없는 사이인 스가와라의 사정을 알았다.
어른들은 스가와라를 신학생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어릴 때부터 한눈파는 일 없이 성실하게 성당에 나왔고 학교 성적도 우수한 그가 그런 기대를 받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본당에서 사제를 배출한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다. 가뜩이나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형편에 루치아노 같은 남자아이는 귀하디귀했다. 신자가족에, 유아세례를 받은 뒤로 내내 한 본당에 적을 두고 있는 데다 줄곧 복사단이었다는 건 이 이상 좋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특히 사목회에 들어있는 스가와라의 대부가 의욕을 갖고 일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신부님이 오라고 하셔서 잠깐 좀. …시미즈는? 이제 전례부 활동도 없잖아."
스가와라의 대답은 역시 키요코의 예상대로였지만 피차 사정을 빤히 아는 것은 스가와라도 마찬가지였다.
얌전한 시미즈는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눈에 띄지 않는 아이도 아니었다. 스가와라로서는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중학생이 되자 시미즈는 주변의 권유로 전례부에 들었고 얼마 후엔 미사 때 작은 단상에 서서 개별기도를 읽었다. 곧 '중등부의 프란체스카'는 청소년부 미사의 성경 봉독을 도맡게 되었다. 모두 프란체스카는 목소리가 참 예쁘다며 칭찬했지만, 목소리만 두고 예쁘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스가와라는 알았다. 목소리, 얼굴, 모습, 움직임까지 키요코는 어디 하나 안 예쁜 구석이 없이 전부 다 예뻤다. 예전부터 그랬다. 이 성당의 누구보다도 꼬마 루치아노가 제일 먼저 알았던 사실이지만, 이제는 모두가 안다. 그는 그것이 좀 쓸쓸했다.
키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주일에 고3들 마지막으로 미사에 서고."
"응."
"우리끼리 뒤풀이를 했거든."
"사무실에서?"
"교리실에서."
"번, 아니… 2번 교실이었겠네."
스가와라는 지난 주일에 학생회 쪽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지만, 역시 오래 다닌 가락은 어디가지 않아 성당 일이라면 척하면 척이었다.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대학 입시를 앞에 둔 고등학교 3학년생들은 보통 이 시기에 한꺼번에 청소년부 활동에서 은퇴했다. 이후에는 각자 주일 미사에만 나오거나, 공부가 바빠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 뒤풀이로 열리는 것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과자파티다.
"그때 거기에 문제집을 두고 온 것 같아서…."
"뭐어?"
스가와라는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가 멈칫하며 자기 입을 막았다. 성소의 높은 천장에 소리가 온통 울렸다. 어른들이 있었다면 경을 칠 일이었다. 사무실로 돌아간 신부님한테도 들리지 않았을까 싶어 조금 찔끔했지만 스가와라는 그래도 계속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평생토록 주말을 성당에서 보낸 녀석으로서도, 대입이 코앞인 고3으로서도, 그녀가 그 분위기에 무슨 정신으로 문제집을 꺼냈을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니 거기서 문제집 생각이 들어? 시미즈도 진짜… 하하하!"
진짜 조금만 보려고 했다고, 그렇게 변명하는 소녀의 목소리 끝이 기어들어갔다. 무뚝뚝한 표정이 된 키요코였지만, 사실은 그 부드러운 핀잔에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실수를 이렇게 즐겁게 놀리고 웃어주는 건 언제나 스가와라밖에 없었다.
자신은 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 데도, 왠지 늘 사람들은 그녀에게 뭔가를 기대했다. 그건 대체로 얌전한 모습이라든지 성실한 태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서 벗어나면 다들 놀라 한다. 키요코는 딱히 그에 대해 불평한 적 없었지만 그게 불편한 일인 건 분명했다. 부드러우면서도 그 푹신함으로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그것은, 강요였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한 번도 그녀에게 그런 느낌을 준 적이 없었다. 키요코는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제가 되는 사람이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스가와라의 웃음이 잦아들고, 키요코는 이제 가방을 놓은 자리 옆에 가만히 걸터앉았다. 부드러운 빛을 받은 마리아 님의 얼굴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앞에 서서 성모상 주위를 장식한 장미 조화를 매만지는 남자아이에게도.
"루치아노는,"
그녀가 말을 꺼냈다.
"루치아노는 신부님이 될 거야?"
스가와라가 시미즈를 돌아봤다.
그녀에게 세례명만으로 불리는 것은 정말, 정말 오랜만이었다. 작은 '키요코 쨩'의 손을 꼭 잡고 눈이 쌓인 계단을 조심조심 오르던 그 겨울의 냄새가 문득 떠올랐다. 먼지와, 얼음과, 돌이 섞여 있는 그 냄새가.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겸양인지 자학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아무튼 말끝은 차분했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그걸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성직의 길을 제안하며 은근히 손짓하는 사람은 그동안에도 많이 있었다. 그 자신도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키요코."
…그녀 스스로는 자신을 재미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듯했지만, 스가와라 편에서 보자면 키요코만큼 지켜봤을 때 재미있고 또 즐거운 사람이 없었다.
키요코가 막 '고등부의 프란체스카'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어중간하게 이른 시간에 도착해버린 스가와라가 예배당 앞에 섰을 때,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군가 단상에 홀로 서서 독서의 연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키요코였다. 바로 그 주의 일요일 정오에 키요코는 마침내 교중 미사의 성서 봉독자로 서게 되어있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듣고 스가와라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드디어, 제일 큰 미사에서, 성당 사람들 모두가, 반짝반짝한 그 애를 알게 되는 때가 와버렸다고.
하지만 빈 예배당에서 혼자 연습하는 키요코를 보고 스가와라는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매 순간 그녀를 그렇게나 신경 쓰던 자신조차 그녀 개인의 하고자 하는 의욕이나, 노력이나 …성취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큰 무대를 앞두고 실수하지 않으려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더욱 잘해내려고 애쓰는 것이 키요코의 진심이고 본모습이다. 그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 그걸 남들이 보는 것이 분했는지 몰랐다…. 그때 확실히 알았다. 어릴 때도 지금도, 자신은 키요코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러니까,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신학교엔 가고 싶지 않아."
키요코는 갑자기 이름을 불리자 어리둥절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가와라를 쳐다봤다. 스가와라가 다가와 키요코가 내려놨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교실에 내려가 보자."
주일 후로 쓸 일이 없었을 테니 책은 아직 그대로 있을 거라며, 스가와라는 앞장섰다. 키요코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개가 된 발소리의 반향음은 어쩐지 한 사람분일 때보다 덜 공허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언젠가는 다시 손을 맞잡아줄지 아닐지, 스가와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건 키요코 맘이니까.'
하지만 기회조차 만들지 않는다면 정말로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그것을 깨닫자, 그는 이제 신학교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신학교만큼은 절대로 가기 싫었다.
문 앞에 다다라서 가방을 들지 않은 쪽 손으로 문을 밀어 연 스가와라가 키요코를 먼저 지나가게 하며 말했다.
"키요코, 언제 같이 스케이트 타러 안 갈래?"
바닥이 미끄러우니 그 생각이 난다면서 고무창 운동화로 바닥을 지치며 장난을 치는 그에게 키요코가 위험하다고 주의를 준다.
"넘어지기 전에 우선 내 가방은 내놓고서 뭐든 했으면 좋겠는데."
스가와라는 키요코를 돌아보며 눈을 접고 웃었다.
그냥 생각난 대로 한 말이었지만 스케이트 장은 꽤 괜찮은 제안 같았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손을 잡고 겨울 냄새를 맡고 싶었다.
2016년 8월
-어릴 때부터 한 성당에 다닌 소꿉친구 설정 AU
-카톨릭 신자
돌 전당에서는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려 쓸데없이 위엄있게 들린다. 키요코는 걸음걸이를 고쳐 발소리를 죽였다.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미사 전후 시간엔 전혀 신경 쓸 일 없는 소리가 지금처럼 사람이 없을 땐 괜히 키요코의 머리칼을 곤두서게 했다.
예배당 입구에 다가선 키요코는 Α와 Ω가 새겨진 중앙의 큰 문이 아닌 낮은 옆문을 밀었다. 하지만 발소리를 죽이느라 뒤꿈치에 힘을 빼고 있어서인지 안 그래도 무거운 문짝은 수월하게 열리질 않았다. 마호가니 색 나무판에 어깨를 기대고 힘껏 밀자 그제야 문이 움직였다. 열린 틈으로 서늘한 공기와 옅은 향냄새가 피어올라 얼굴을 감쌌다.
앞은 거의 어둠이었다. 키요코는 발밑을 주의하며 앞으로 나아가 돌로 된 성수대 앞에 섰다. 수반에 고인 성수를 찍은 손끝이 이마와 가슴과 왼쪽과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다시 가슴 앞에서 두 손바닥이 만나 오른쪽 엄지가 왼쪽 엄지 위로 포개진다. 키요코는 그대로 예배당 앞쪽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천장이 낮은 입구의 아치를 벗어나자 어둠은 겨우 발밑으로 물러났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깃불이 켜지지 않은 본당은 한낮에도 침침하다. 제대를 향해 걸어가는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한낮의 햇볕이 겨우 내려와 색색으로 아롱져 굴렀다.
예배당 가장자리에 다다른 키요코는 가장 가까운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성모상 앞으로 갔다. 그때 어딘가에서 찰카닥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철렁해 고개를 돌리니, 제단 옆 쪽문에서 누군가가 내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뭐해?"
김이 빠진듯한 목소리가 말했다. 키요코는 내심 마음이 편해져 맞받아쳤다.
"스가와라야말로."
동갑인 스가와라는 키요코와는 어릴 때부터 한 본당에서 알고 지낸 사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미사에서 복사服事를 했던지라 제대 옆 준비실에서 나오는 모습이 여유로웠다. 티셔츠에 편한 바지 차림을 한 스가와라는 제대를 내려와 키요코 쪽으로 곧장 다가왔다. 제단 바로 앞에서도 그 위쪽 십자가 방향으로 대충 고개만 꾸뻑 숙이고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 문에서 티셔츠 입고서 걸어 나오니까 기분 이상하다."
"평소에도 다들 티셔츠 입고 있거든요? 위에 뭘 더 걸치고 있어서 그렇지."
스가와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키요코가 이 본당에 다니기 시작한 게 5~6살 때니 고등학교 3학년, 17살인 지금은 서로 알고 지낸 지가 10년이 넘었다. 엄마 손을 잡고 성당에 오던 유치부 때부터 쭉 봐온 사이라도 서로 여자아이 남자아이다 보니, 자랄수록 어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둘이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키요코는 무척 오랜만인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데서 뭐하려고? 혼자 묵상?"
"아니. 아래에서 수산나 수녀님을 만났는데…"
어린이와 청소년부 미사에 늘 함께 하는 수산나 수녀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깜박깜빡하는 버릇이 있었다. 성모상 앞의 다 된 초를 바꿔놓으려던 것을 외출하려다 떠올리고 마침 본당 앞에서 마주친 키요코에게 대신해 줄 것을 부탁하는 바람에 키요코가 여기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비 초는 어디에 두지?"
하지만 막상 새로 초를 꺼내려니, 키요코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에게 부탁한 사람이 수산나 수녀라는 것을 이미 들었기에 스가와라는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내가 알아. 뒤에서 가져올게."
하고 다시 문 안으로 사라진 스가와라는 금세 하얀 초 두 개를 한 손에 잡고서 나타났다. 손을 내미는 키요코에게 고개를 저으며 그가 성모상 앞으로 다가섰다.
"걱정 마. 내가 초만 10년을 켰어."
가벼운 사양을 하고, 스가와라는 손을 움직였다.
미사 중에 사제를 도와 도구를 옮기거나 종을 울리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복사는 보통 어린 남자아이들이 맡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학년 아래로는 성당에 점점 아이들이 줄기만 했기 때문에, 루치아노 스가와라 코우시 군은 고등학생이 되어 주임신부님보다 키가 커질 때까지도 복사단에 들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사 전에 제대의 촛불을 켜는 일은 점화기를 다루는 것이다 보니 보통 나이 많은 아이들이 주로 맡아 했고 그중에서도 최고참인 스가와라가 제일 자주 했다. 하지만 그런 경력이 있는 것치고는 평범하게, 스가와라는 다 탄 초의 기울어진 심지에 새 초의 흰 심지를 대어 불을 옮겨붙일 뿐이었다. 애초에 미사 때 쓰는 손잡이가 긴, 금색의 멋진 점화기도 없었다. '뭘 기대한 거지.' 키요코는 시시해 하는 자신에게 물었다.
단 위가 한층 밝아지고, 곧 매끈하던 새 초의 심지 주변이 투명하게 변해 일렁이기 시작했다. 둘은 잠시 말없이 그걸 보다가 두 손을 모으고 성모상에 고개를 숙였다.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몸에 배인 예절이다. 고개를 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동시에 풋, 웃었다.
처음 만났던 무렵도 이랬다. 학교에 올라가기 전의 둘은 서로 눈이 마주치면 후후 웃는, 사이좋은 단짝이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 유치원 시절의 어느 겨울부터 시미즈 키요코는 이곳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이미 있었다. 가족과 함께 아기 때부터 다녔기 때문에, 무뚝뚝한 남자 어른들조차도 루치아노라는 세례명을 들으면 알았다. 작은 남자아이와 희게 웃는 그 얼굴을. 성당에 익숙했던 루치아노는 딱 맞는 털모자 아래로 반짝반짝한 까만 머리를 늘어트린 '키요코 쨩'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코우 쨩', 그리고 가끔 '루치아노'라고 불러주는 그 아이를 스가와라는 정말로 좋아했다.
하지만 키요코가 성당생활에 익숙해지고, 결정적으로 세례를 받게 되면서 둘 사이는 완전히 갈려버렸다. 키요코가 예비자 교리 시간에 함께 다니던 여자친구들과 완전히 친해져 버린 것이었다. 여전히 인사는 주고받았지만 이제 제일 친한 친구는 서로가 아니었다. 여자가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친하게 지내면 놀림 받는 나이였다. 소학교 고학년 때 성체성사를 받을 때는 둘이 같은 시기에 교리교육을 받았지만, 이미 서로 호칭은 '스가와라', '시미즈'가 되어있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 눈에 들었던 스가와라는 복사 일 때문에 유년부 활동에도 늘 늦기 일쑤라 말 붙일 틈도 별로 없었다.
"스가와라는 무슨 일로 와있었어?"
"음? 아 뭐…"
스가와라는 말을 흐렸다. 하지만 사람이 적은 곳에서는 말이 돌기 마련이라, 나서는 법이 없는 키요코마저도 별 대화가 없는 사이인 스가와라의 사정을 알았다.
어른들은 스가와라를 신학생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어릴 때부터 한눈파는 일 없이 성실하게 성당에 나왔고 학교 성적도 우수한 그가 그런 기대를 받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본당에서 사제를 배출한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다. 가뜩이나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형편에 루치아노 같은 남자아이는 귀하디귀했다. 신자가족에, 유아세례를 받은 뒤로 내내 한 본당에 적을 두고 있는 데다 줄곧 복사단이었다는 건 이 이상 좋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특히 사목회에 들어있는 스가와라의 대부가 의욕을 갖고 일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신부님이 오라고 하셔서 잠깐 좀. …시미즈는? 이제 전례부 활동도 없잖아."
스가와라의 대답은 역시 키요코의 예상대로였지만 피차 사정을 빤히 아는 것은 스가와라도 마찬가지였다.
얌전한 시미즈는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눈에 띄지 않는 아이도 아니었다. 스가와라로서는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중학생이 되자 시미즈는 주변의 권유로 전례부에 들었고 얼마 후엔 미사 때 작은 단상에 서서 개별기도를 읽었다. 곧 '중등부의 프란체스카'는 청소년부 미사의 성경 봉독을 도맡게 되었다. 모두 프란체스카는 목소리가 참 예쁘다며 칭찬했지만, 목소리만 두고 예쁘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스가와라는 알았다. 목소리, 얼굴, 모습, 움직임까지 키요코는 어디 하나 안 예쁜 구석이 없이 전부 다 예뻤다. 예전부터 그랬다. 이 성당의 누구보다도 꼬마 루치아노가 제일 먼저 알았던 사실이지만, 이제는 모두가 안다. 그는 그것이 좀 쓸쓸했다.
키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주일에 고3들 마지막으로 미사에 서고."
"응."
"우리끼리 뒤풀이를 했거든."
"사무실에서?"
"교리실에서."
"번, 아니… 2번 교실이었겠네."
스가와라는 지난 주일에 학생회 쪽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지만, 역시 오래 다닌 가락은 어디가지 않아 성당 일이라면 척하면 척이었다.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대학 입시를 앞에 둔 고등학교 3학년생들은 보통 이 시기에 한꺼번에 청소년부 활동에서 은퇴했다. 이후에는 각자 주일 미사에만 나오거나, 공부가 바빠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 뒤풀이로 열리는 것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과자파티다.
"그때 거기에 문제집을 두고 온 것 같아서…."
"뭐어?"
스가와라는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가 멈칫하며 자기 입을 막았다. 성소의 높은 천장에 소리가 온통 울렸다. 어른들이 있었다면 경을 칠 일이었다. 사무실로 돌아간 신부님한테도 들리지 않았을까 싶어 조금 찔끔했지만 스가와라는 그래도 계속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평생토록 주말을 성당에서 보낸 녀석으로서도, 대입이 코앞인 고3으로서도, 그녀가 그 분위기에 무슨 정신으로 문제집을 꺼냈을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니 거기서 문제집 생각이 들어? 시미즈도 진짜… 하하하!"
진짜 조금만 보려고 했다고, 그렇게 변명하는 소녀의 목소리 끝이 기어들어갔다. 무뚝뚝한 표정이 된 키요코였지만, 사실은 그 부드러운 핀잔에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실수를 이렇게 즐겁게 놀리고 웃어주는 건 언제나 스가와라밖에 없었다.
자신은 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 데도, 왠지 늘 사람들은 그녀에게 뭔가를 기대했다. 그건 대체로 얌전한 모습이라든지 성실한 태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서 벗어나면 다들 놀라 한다. 키요코는 딱히 그에 대해 불평한 적 없었지만 그게 불편한 일인 건 분명했다. 부드러우면서도 그 푹신함으로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그것은, 강요였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한 번도 그녀에게 그런 느낌을 준 적이 없었다. 키요코는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제가 되는 사람이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스가와라의 웃음이 잦아들고, 키요코는 이제 가방을 놓은 자리 옆에 가만히 걸터앉았다. 부드러운 빛을 받은 마리아 님의 얼굴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앞에 서서 성모상 주위를 장식한 장미 조화를 매만지는 남자아이에게도.
"루치아노는,"
그녀가 말을 꺼냈다.
"루치아노는 신부님이 될 거야?"
스가와라가 시미즈를 돌아봤다.
그녀에게 세례명만으로 불리는 것은 정말, 정말 오랜만이었다. 작은 '키요코 쨩'의 손을 꼭 잡고 눈이 쌓인 계단을 조심조심 오르던 그 겨울의 냄새가 문득 떠올랐다. 먼지와, 얼음과, 돌이 섞여 있는 그 냄새가.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겸양인지 자학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아무튼 말끝은 차분했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그걸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성직의 길을 제안하며 은근히 손짓하는 사람은 그동안에도 많이 있었다. 그 자신도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키요코."
…그녀 스스로는 자신을 재미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듯했지만, 스가와라 편에서 보자면 키요코만큼 지켜봤을 때 재미있고 또 즐거운 사람이 없었다.
키요코가 막 '고등부의 프란체스카'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어중간하게 이른 시간에 도착해버린 스가와라가 예배당 앞에 섰을 때,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군가 단상에 홀로 서서 독서의 연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키요코였다. 바로 그 주의 일요일 정오에 키요코는 마침내 교중 미사의 성서 봉독자로 서게 되어있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듣고 스가와라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드디어, 제일 큰 미사에서, 성당 사람들 모두가, 반짝반짝한 그 애를 알게 되는 때가 와버렸다고.
하지만 빈 예배당에서 혼자 연습하는 키요코를 보고 스가와라는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매 순간 그녀를 그렇게나 신경 쓰던 자신조차 그녀 개인의 하고자 하는 의욕이나, 노력이나 …성취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큰 무대를 앞두고 실수하지 않으려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더욱 잘해내려고 애쓰는 것이 키요코의 진심이고 본모습이다. 그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 그걸 남들이 보는 것이 분했는지 몰랐다…. 그때 확실히 알았다. 어릴 때도 지금도, 자신은 키요코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러니까,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신학교엔 가고 싶지 않아."
키요코는 갑자기 이름을 불리자 어리둥절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가와라를 쳐다봤다. 스가와라가 다가와 키요코가 내려놨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교실에 내려가 보자."
주일 후로 쓸 일이 없었을 테니 책은 아직 그대로 있을 거라며, 스가와라는 앞장섰다. 키요코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개가 된 발소리의 반향음은 어쩐지 한 사람분일 때보다 덜 공허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언젠가는 다시 손을 맞잡아줄지 아닐지, 스가와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건 키요코 맘이니까.'
하지만 기회조차 만들지 않는다면 정말로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그것을 깨닫자, 그는 이제 신학교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신학교만큼은 절대로 가기 싫었다.
문 앞에 다다라서 가방을 들지 않은 쪽 손으로 문을 밀어 연 스가와라가 키요코를 먼저 지나가게 하며 말했다.
"키요코, 언제 같이 스케이트 타러 안 갈래?"
바닥이 미끄러우니 그 생각이 난다면서 고무창 운동화로 바닥을 지치며 장난을 치는 그에게 키요코가 위험하다고 주의를 준다.
"넘어지기 전에 우선 내 가방은 내놓고서 뭐든 했으면 좋겠는데."
스가와라는 키요코를 돌아보며 눈을 접고 웃었다.
그냥 생각난 대로 한 말이었지만 스케이트 장은 꽤 괜찮은 제안 같았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손을 잡고 겨울 냄새를 맡고 싶었다.
'2차 > HQ'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내 꿈이 너무한 썰 (0) | 2016.12.18 |
|---|---|
| 無題 (0) | 2016.11.08 |
| 먼저 빛나고 뒤이어 무너지는 것 (전체 공개) (0) | 2016.11.08 |
| 너의 절반 (0) | 2016.11.08 |
| cherie (0) | 2016.11.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