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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HQ

cherie

b1u5h_J 2016. 11. 8. 21:48
하이큐 스가키요
2016년 6월
-원작 배경
-스가와라에게 립스틱을 발라주는 시미즈




조금 말라있던 입술 위로 촉촉한 붓이 흐른다. 입술선을 따라 붓을 눕혀 미끄러트리는 그녀의 손이 자못 신중했다. 엷게 혈색이 배어난 탄탄한 살갗의 세로 주름을 따라 털 끝에 배어들었던 분홍빛이 녹아나고, 붓의 움직임대로 얌전히 달라붙는다. 붓끝이 다문 입술 사이를 부지런히 달려나갈 때 그는 참을 수 없는 간지럼과 함께 뱃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뭔가를 느꼈다. 그 말할 수 없이 이상한 감각까지도 간지럼과 부끄럼 안에 도매금으로 끼워 넘기며, 스가와라 코우시는 코로 살금살금 숨을 들이마셨다.
최대한 시선을 돌려도 눈 앞에 시미즈 키요코가 있다. 그것도 자신의 얼굴에 온 신경과 손 끝을 집중하면서. 눈을 감으면 오히려 더 상황이 이상해질 것 같아 눈조차 감을 수가 없었다. 스가는 자책했다. 이 상황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지 아닌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시미즈 키요코의 방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아, 입술에 그녀가 쓰는 립스틱을 바르고 있다니. 그것도 키요코가 직접 붓을 들어 그의 입술에 발라주는 것을.


일단 시작은 그였다. 그의 탓이었다.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오히려 들떠 있던 것부터가 문제였다. 신발을 벗고 올라서는 것까지는 버벅거리지 않고 성공했었다. 어디로 보나 태연해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방면에서 방해가 덮쳐왔다. 바로 공기였다. 평소 키요코에게서 은은하게 느껴지던 좋은 냄새가 여기선, 그냥 대기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녀의 안내를 따라 방에 자리잡자 향은 더해졌다. 열린 창문에서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왔지만 별로 향기를 희석시키지는 못하는 듯했다. 일부러 평소보다 더 변죽좋게 "시미즈의 방이라니 어째 들뜬다~" 어쩌구 하며 들어섰지만 그건 가족들이 아무도 안계시다는 데에 쫄아서 나온 큰 소리에 불과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거기에 "친구를 데려온 적은 있지만, 방에 남자가 들어온 건 스가와라가 처음이네." 하고 대꾸하는 그녀도 문제였다.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게 시미즈의 문제야."

손님맞이를 위해 내온 찻잔을 받으며 그가 그렇게 말하자, 키요코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을 뿐 더 묻지 않았다. 그대로 그는 할말을 찾지 못한 채 쭈뼛쭈뼛 방 안을 구경했다. 그러다 책상 한쪽 작은 상자 안에 단촐하게 무리지은 화장품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니 키요코가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어 보여주기 시작했다. 세수한 뒤 얼굴이 당기지 말라고 바르는 것, 추워서 피부가 틀 때 쓰는 작은 크림통, 친구에게 선물받고 아직 뜯지않은 입술보호제, 그야말로 여자가 쓸 것 같이 생긴 거울 달린 분첩, 립스틱, 치약처럼 생긴 핸드크림… 딱 하나밖에 없는 매니큐어 통을 손에 들고 이건 자주 열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키요코는 하나씩 열어서 보여주며 짧게 설명을 해주었다. 두 개쯤 있던 챕스틱같은 것은 알고보니 전부 다 다른 데 바르는 것이었다. 스가는 모기기피제가 그렇게 나오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녀가 은색 립스틱을 집어 뚜껑을 열며 말했다.

"이 색은 스가와라한테도 어울릴 것 같아."

웃으면서 "그럼 한번 발라볼까?" 하고 받아친 건, 반쯤 농담이었는데…

뚜껑을 열고 슥슥 돌리자 은빛 케이스 안쪽에서 진한 분홍색 막대가 올라온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그것을, 스가는 얼음과자같다고 생각했다. 케이스도 내용도 여는 법도 모두 신기했다. 립스틱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이건 키요코의 물건이니까.'

키요코의 하얀 손가락 끝에서 작은 손톱들이 립스틱을 잡느라 눌려 분홍빛으로 물든 것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가 스가의 뺨에 손 끝을 대고 고개를 돌리게 했을 때는 아예 생각이 멈추어버렸다. 키요코는 립스틱을 그대로 스가의 아랫입술에 문질러보더니, 고개를 한번 젓고는 상자에서 작은 펜같은 것을 꺼내서 그대로 립스틱을 찔렀다. 순간 모든 흐름이 어리둥절하던 스가였지만, 다시 가만히 보고 있으니 알 수 있었다. 그건 펜이 아니라 붓이었다. 키요코가 하고 있는 것은 작은 붓에 립스틱을 먹이는 작업이었다. 붓끝을 차분하게 정리한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오른뺨에 손을 겹쳤다. 그의 얼굴에 집중하며 조금 기울인 그녀의 얼굴 각도가 어쩐지 뭔가를 상상하게 했다. 어느새 그는 숨을 쉬는 것도 조심하고 있었다.


그의 체감보다는 짧았겠지만, 그래도 작업은 꽤나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키요코는 "원래부터 잘하진 못하는데, 남에게 해주는 경우는 더 없으니까," 라며 미안해했다.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숨이 피부에 닿아왔다. 계속 그의 입술과 그 주변을 주의깊게 보고있는 눈도, 스가에겐 곤란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도 면도는 거의 할 필요가 없는 편이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지금 수염이 조금 나있는지 어떤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오늘 세수할 때 더 유심히 살피고 올 것을. 침을 삼키는 것도 힘들었다. 평소 침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넘긴 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보이기도 부끄러웠고 크게 꿀꺽 소리를 내는 것도 꺼려졌다.
게다가 붓질을 거듭하는 사이에 입술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붓으로 이렇게 쪼잔한 붓질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발려진 립스틱의 무게가 느껴질 수 있는 건지 그는 신기할 뿐이었다. 끈적함이라 표현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그 무게감때문에 립스틱이 얼마나 발려졌는지, 작업이 어느 정도나 진행되고 있는지를 그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한겹 씌워진 감각 덕에 그는 역으로 입술이 얼마나 얇디 얇은 피부로 되어있는 부분인지, 또 얼마나 예민한 부위인지를, 실감하고 절감하게 되었다. 가느다란 털 끝이 이따금 찌르는 듯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살며시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의 다리가 슬금슬금 스가의 무릎 위를 침범해오는 게 곤란했다. 입술을 칠하는데 열중해 조금씩 더 앞으로 앞으로 그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아직은 빠르다 싶기도 하고 가정 내에서 이런 파렴치한 생각을 해선 안될 성 싶고…

'그럼 가정 바깥에선 해도 되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갔을 때,
"다 됐어."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입꼬리 부분을 약지로 한 번 살짝 쓰다듬은 그녀는 손을 떼고, 분첩을 열어 거울면을 이쪽으로 향해주었다.
자그마한 거울 속에는 입술만 보였다. 평소의 자연스럽게 혈색이 도는, 눈에 띄지않는 탁한 연분홍빛의 입술이 아니라, 물기 어린 광택에 선명한 분홍색 입술이.

"어머나, 이게…나?"

짐짓 웃기기 위한 대사를 던졌지만 그 대사를 말하자 거울 속의 입술도 함께 움직였다. 그건 정말 스가의 입술이었던 것이다.

"와아, 진짜 신기해… 시미즈가 어울릴 거라고 했던 건 근거가 있는 말이었어."

그녀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스가의 눈은 계속 거울 속을 향하고 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입이 작아보여."
"입술선보다 조금 안쪽으로 칠해서. 피부색이 연하고 밝아서 더 눈에 띄는 색으로 안쪽을 칠하니까 원래 입술선이 별로 눈에 띄지 않네."

"또 입꼬리가 뾰족해 보이게 되어서 좀더 작게 보이는 걸 거야." 하고 그녀가 말하는 동안 스가는 연신 거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오오, 를 연발할 뿐이었다. 그가 얼굴 전체를 거울에 담으려 팔을 쭉 뻗자 키요코가 결국 풋, 하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쪽.
다가온 입술이 작은 소리를 내며 스가의 얼굴에서 떨어졌다. 분첩이 낙하했다.

"…어, 어어어어?"

셋, 떨어뜨린 분첩의 안위. 둘, 눈 앞에서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그녀. 하나, 뺨보다 훨씬 위 -광대뼈 위쪽으로 남은 부드러운 감촉. 이미 립스틱을 바른 자기 얼굴은 스가의 의식 저편으로 날아갔다. 갈피를 잡지못한 채 눈만 크게 뜨고 굳어있던 스가의 입술이 이내 굳게 닫혔다. 위아래 입술을 붙였을 뿐인데 발려진 립스틱이 겉돌며 입술 사이로 서로 붙어버려서, 스가는 다문 입이 전에 없이 불편했다. 목깃 언저리부터 맨살이 드러난 뺨까지 화악, 불이 오른다.

"아, 정말… 키요코~!"

완전히 기운이 빠진 듯한 그의 항의에, 키요코는 쿡쿡 웃었다. 계속 시미즈라고 부르고 있던 주제에 속으로만 들떠서 키요코, 키요코 하던 것이 불의의 습격에 터져나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스가는 말문이 막혀 더는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어졌다. 얼굴이 이 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 것처럼 달아올랐다. 키요코는 앉은 자리에서 헤매고 있는 그를 잠시 흥미로워 하는 눈으로 보고 있는가 싶더니, 손을 들어 안경을 벗었다. 그걸 본 스가는 다시 턱, 하고 목이 막혀버렸다.
이제는 웃음기를 완전히 거둔 그녀가 다시 가까워져 온다. 무거워진 입술에 바로 닿아오는 마이너스의 질량이 아득해, 스가는 숨을 삼켰다. 머릿속이 표백된다.

숨도 한 번 쉬어보지 못한 사이, 그녀의 작은 입술이 그의 입술 위를 더듬어갔다. 쓰다듬는 것처럼 스치던 입술이 도장을 찍듯이 꾹 눌러지고, 다시 쪽, 쪽, 소리를 내며 몇번이고 맞춰지는 동안 그는 눈도 감지 못한 채 빛이 희게 아롱진 검은 속눈썹을 보고 있었다. 입술을 댄 채로 멈춘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열릴 때서야 그에 맞춰 시선을 내릴 수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이 그의 오른쪽 어깨에 올라와 있어, 손바닥의 따끈한 체온이 셔츠 너머로 번져왔다. 또 다시 키요코의 숨결이 얼굴에 내려앉는다. 거리가 가까워져, 이번에는 훨씬 따뜻했다.
스가는 눈을 감으며 옆으로 조심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아까 옆에 내려놨던 찻잔에 빠졌다. 차는 이미 다 식어있었다. 잔을 잡고 조심스레 팔을 뻗어 엎지르지 않도록 밀어두며 스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맞닿아있는 키요코의 입술을 완전히 침 범벅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낭패감에 휩싸인 채 스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입술과 입 안이 아직도 그녀의 감촉으로 마비되어 있었다. 혀 끝에서 아까 마신 차의 향이 맴돈다.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턱선을 따라 미끄러트리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감싸안아왔다.
눈 앞에서 아직 가쁜 숨을 쉬는 키요코의 입가가 조금 붉게 달아올라 보였다. 최대한 힘을 빼고 임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나, 그녀를 아프게 만든 건가, 순간 흠칫했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눌려서 생긴 자국같은 것이 아니라 그가 입술에 바르고 있던 분홍색 립스틱이 그녀의 입가에 엉망으로 번져있는 것이라는 걸.
힘을 뺀 엄지 끝으로 키요코의 입꼬리를 연신 쓸어주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된 그를, 키요코는 살짝 치켜뜬 눈으로 보며 웃었다.

"입술 바르는 건 알려줬고, 그걸 망치는 법도… 이제 알았지?"

스가는 자기도 모르게 꿀꺽, 커다란 소리를 내며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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