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차/HQ

너의 절반

b1u5h_J 2016. 11. 8. 22:06

하이큐 스가와라 코우시x시미즈 키요코
2016년 7월
-원작 기반으로 20대가 된 시점
-메인캐릭터의 사망 (키요코), 엑스트라로 오리지널 캐릭터 등장, 커플링 2세 등장, 결론은 임신튀..

 

 

 

"그러고 보니 키요코 씨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스가와라 코우시는 술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가던 그 자세 그대로 눈만을 들어 말한 이를 찾았다. 머리는 길었지만 여전히 인상은 까끌까끌 행동거지는 시원시원한 타나카 류노스케였다. 다행히 그는 멀리 대각선 방향에 있는 스가와라 쪽은 의식하고 있지 않은듯 보였다.

"글쎄. 마지막으로 본게 대학 땐가…"
"나도 그래. 시미즈까지 우리 학년 넷이서 만나기도 하고 그랬는데, 얘네들 구직활동할 즈음부터 연락이 안되네…."

입 안으로 들어오는 맥주는 여전히 찬데 목 안부터 가슴까지가 뜨겁다. 다른 녀석들이 먼저 말을 꺼내준 덕에 스가와라는 입도 열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었다. 이 불안도 흔들림도 일부러 가장한 침착함까지도 모두 다, 티를 내어선 안되었다. 모두의 이야기에 반응하며, 분위기를 잘 타고, 아무튼 잘 떠들곤 하는 평소의 자신이라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어 버릴 것 같아 스가와라는 일부러 오가는 말과 말 사이로 엇갈리는 타이밍을 노려 자연스럽게 잔을 들고 맥주를 들이켰다. 젓가락을 들어 먹을 것도 없는 눈 앞의 접시를 찍어도 봤다.
오랜만에 귀향한 녀석들이 있어 모인 카라스노 배구부 출신들만의 술자리였다. 고교 3년을 같이 뛰고 땀흘리던 이 조합으로 만나면, 가끔 그녀의 이름이 나오곤 했다.
시미즈 키요코.

"온통 남자놈들이라 시미즈, 역시 좀 부담이었는지도 몰라."
"그래도 결혼할 때가 되면 연락줬으면 하는데 말야."
"하하, 혹시라도 연락 안오면 서운할 거 같아…."
"아아! 키요코 씨가 결혼이라니 상상만으로 분해요!"
"타나카 너 아직도 그 모드냐."
"너 애인 있다지 않았어?"
"키요코 씨의 짝으론 엄청난 사람이 아니면 안되지!"
"그렇지! 키요코 씨는…여신이니까!"

스가와라는 헛웃음을 지으며 1년 아래 후배였던 그들을 바라보았다. 혹시 싶었지만 오늘도 여느때와 같은 흐름이다. 술잔을 계속 들었다 놨다하며 입에 대고 있자니, 웨이트 트레이닝하는 것도 아니고 무거워서 내려놓았다.

"와, 하지만 결혼이라니. 우리들 벌써 그런 얘기가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된거군요."
"그런 나이야."

사와무라 다이치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시미즈 선배는 여자분이니까, 남자들 체감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 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겠네요."

괜히 뒷목이 굳는다. 이대로 화제가 건너가 줬으면. 스가와라는 눈으로 테이블 전체를 빠르게 살피곤 몸을 돌려 점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요!"
"생맥주 하나랑 타코와사비 하나 주세요. 너흰 뭐 시킬 거 없어?" "저는 괜찮아요." "우롱하이도 하나 주세요." "뭐야, 벌써 마무리야?" "아, 벌써 이런 나이라서 말이다." "너희들, 우리는 너희보다 1살 연상이라는 건 유념하고서 이런 나이 어쩌구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아사히는 근 10년 노화 완료된 상태로 살고 있잖아?" "…야아." "완료인지는 알 수 없지, 아직은!" "야아…." "선배들도 아직 이 분위기십니까! 와하하하!" "악. 노야, 귀 아파!" "그러게 노야씨 옆에 앉을 때 예견했어야지." "그래서 넌 거기 앉은 거냐?" "놀라운 위치선정."
왁자해진 술자리의 분위기 속으로 다시 얌전히 잠겨들며 스가와라는 와하하 웃었다. 입안에 남은 맥주가 쓰다.
'왜 아직도 그 이름을 들으면 의식적으로 표정을 고쳐야 하는 건지.'
이럴 때마다 그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고, 아직까지 한심한 채로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시작은 꼭 이런 술집이었다.
처음 대학에 갔을 때는 새로운 환경에 들떠있으면서도 그것이 버거워서, 친구들 모두와 자주 연락을 나눴다. 학기 중에도 집에 올때마다 중학교 친구고 고등학교 친구고 이놈 저놈을 만나고, 대학에서의 첫번째 여름방학에는 여자 매니저였던 시미즈까지 고등학교 배구부 동기 넷이 다 모여 논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달라진 생활에 적응해가며 옛 친구들끼리는 만남이 뜸해졌고, 정신차려보니 남자배구부 동기가 함께 모인 것이 1년도 넘어있었다. 가끔 메일이나 메신저 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보니 서로 얼굴을 보고 직접 만난지가 그렇게 오래되었다는 걸 한참 뒤에야 깨닫게 된 대학 3학년의, 어느 날.
오랜만에 재회한 동창들은 변함 없는 듯 많이 변해있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여전히, 어제도 그제도 계속 만난 듯이 착각할 정도로 편했다. 스가와라는 그날 하루 종일 들떠있었다. 그녀는 츄하이를 마셨던가, 생맥주를 택했던가. 아니, 츄하이를 마셨던 건 그녀가 아니라 스가와라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분낸답시고 어른 흉내를 내어 사케를 시켰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안하던 짓을 했는지도 모른다.
술집을 나와 어두워진 골목에서 그는 같은 방향인 시미즈를 책임지고 바래다주겠다며 다이치와 아사히를 보냈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늘 바라보던 아름다운 동창생의 옆자리를 차지한 것이 자랑스러워 조금 재듯이 그녀 옆을 걸었던 기억도 난다. 잡담에 미소짓는 그녀의 입술 위로 가로등 불빛이 맴도는 것을 보고있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스가와라는 낯선 방에서 깨어났다. 작은 침대 위, 연파랑색 이불 속, 그의 팔 안에, 시미즈 키요코가 엎드려 누워있었다. 벌거벗은 가슴에 닿은 뺨과 머리카락이 따뜻하고 차가웠다. 당황은 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간밤의 일이 전부, 단편적으로나마 떠올랐기 때문에.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말에 시미즈의 방에 들어갔다. 자신이 시미즈를 유혹했고, 시미즈가 거기 응했다. 시미즈 키요코는 예상보다 따뜻했고, 아주 부드럽고, 기분좋았다…. 지금 와서도 그 처음 밤의 일은 눈을 뜬 순간의 회상으로만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어쩌면 그녀는 스가와라만큼, 배구부 동기들을 만나는 것이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가진 술자리에 신이 났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가와라에게 집에 들어오라 권하고, 그가 돌아간 후 혼자 남겨질 게 쓸쓸하게 느껴져서, 그래서 그를 …받아준 것일지도 모른다. 딱딱한 맨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스가와라는 다시 그녀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처음 시미즈의 집에서 눈을 뜬 날, 스가와라는 씻고 나와서 티셔츠를 빌렸다. 방범용으로 빨랫대에 걸기 위해 가지고 있었다는 남자티셔츠는 그에게 잘 맞아서, 스가와라는 그만 돌아갈 때 그대로 안에 입고 가버리고 말았다. 대신 두고 간 이너는 주중에 역앞의 가게에서 만나 건네 받았다. 데이트였다. 적어도 스가와라는 데이트로 만들 셈이었다. 식사를 하고, 계산은 그가 했다. "여자를 에스코트하는 남자는 이를테면 손님을 초대해서 대접하는 주인의 입장인 거래." 하고 어디선가 들은 말을 그녀에게 하자 그녀가 웃었다. 어떤 의미의 웃음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스가와라는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달 가량 지나자 그녀에게서 "오늘은 일찍 끝나니까 같이 저녁 먹자." 라고 연락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시미즈는 단기대학을 다니다 직업 자격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학원이 가까운 번화가에서 자취하고 있었고, 스가와라도 대학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나와살고 있었다. 서로 오가는 일이 많아졌다. 주말에는 아무 약속도 예정도 잡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고 늦잠을 잤다. 그녀가 늦는 날에는 역 앞까지 데리러 나가서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영화를 보러갔다.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했다. 밤에는 같은 침대 안에서 맨몸으로 뒤엉키며, 그녀가 허술해진 틈을 노려 이름을 불렀다. 키요코, 키요코, 하고.
행복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문득 한 이불 안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눈을 떠보면, 처음엔 불편해보이게 웅크리고 엎드려 잠들던 그녀가 이제 위를 보고 바로 누운 채 단잠에 빠져있었다. 그 옆모습을 볼 때면 이것이 제 분수에 걸맞지 않는 호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혹시라도 두 사람에게 깃들었던 행복 님이 그걸 알고서 더 알맞은 자리를 찾아 떠나가게 될까봐 입 밖에는 내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했다.

끝은 전조도 없이 찾아왔다. 학기가 끝나던 날, 시험에 시달리느라 며칠 만나지 못한 그녀를 불러 요리라도 해줄까 싶어 그는 메일을 보냈다. 답장이 오지 않아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서 몇시간 잠자코 있다가 그녀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그 집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전화기를 붙잡고 살았다. 그녀는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미칠 것 같았다.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궁리하며 사방을 찾아다녔다. 방을 렌트해 준 사무소에서는 이전 세입자, 즉 그녀가 깨끗하게 이사나가버렸다는 정보밖에 얻지 못했다. 그녀가 다녔던 학교에도 찾아갔다. 그녀는 직전 학기에 수료를 마치고 이미 학교를 떠난 상태여서,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시 그녀에게 전화하자,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쌀쌀하게 반겨주었다. …그녀가 전화를 해약한 것이다.
잡히는 것도 없이 사방을 쑤시고 다녔다. 그녀가 다니던 학원, 스터디를 꾸렸던 곳,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고등학교 때 알던 그녀의 본가는 졸업 후에 이사했다. 재작년 쯤 단기대학에 막 입학했을 무렵의 그녀에게 직접 들었던 이야기다. 혹시 그녀가 다니던 학교를 샅샅히 흝으면 같이 학교생활을 했던 사람을 찾을 수도 있다는데에도 생각이 닿았다. 그녀와 연락이 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만약 그녀를 찾으면? 스가와라의 생각은 거기서 그쳤다.
찾으면, 그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나를 완전히 끊어내고 떠나버렸는데.'

거기까지 다다른 그의 정신은 무너져내렸다. 그 후 1-2주 정도는 살아있었다는 기억이 아예 없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취방의 선반 한쪽이 누가 일부러 뒤집어 엎은 것처럼 쓸려나가 있는 채로 지내고 있었다. 아마 스가와라 자신이 한 짓이었겠지만. 핸드폰에 쌓인 연락에 필요최저한의 횟수로 AI처럼 답한 기록과 영수증 뭉치만이 그 동안 스가와라 코우시가 숨을 쉬고 먹고 자고 움직이며 생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어수선한 방 안을 치우며 그는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상한 많은 것을 버렸다. 지나간 영화표나 그런, 잡동사니들.
떠올려보면 그녀에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그에겐 없었다. 친구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며 소개한 적도 없었다. 아니, 사귀자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애인이라 자칭한 적도 없다. 정말로 몇달 동안 그렇게 스며들듯이, 치사하게, 그녀 곁에 그저 있었을 뿐이었다. 자기 기분만 앞세워 옭아맸던 것이 아닐까 무서워졌다. 처음부터 둘 사이에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어쩌면 그 날, 술에 취해 남녀 사이가 된 그 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스가와라 혼자였는지도 모른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시미즈 키요코에 대해 잘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면 오늘처럼 가끔 그녀의 화제가 나오는 적이 있었다. 몇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시미즈를 입에 올렸지만 역시 버거웠다. 평범한 어조와 표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힘들었다. 그나마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온 것이 학창시절을 공유하는 옛 팀메이트나 친구들이어서, 스가와라는 겨우겨우 화도 내지않고 울지도 않고 넘길 수 있었다. 그들 앞에서는 뭐든 괜찮아보이고 싶었다. 너무나 소중한 그들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소식이 없는 시미즈에게 서운해하는 이야기들이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그 앞에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였다. 스가와라 혼자만이 그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의미였으니까.

그러나 며칠 후 당도한 것은, 시미즈 키요코의 결혼소식같은 것이 아니었다.


"경조사에 내 이름을 걸고 얼굴 내밀게 되는 나이가 되어버렸어."
하고 말하며 자리를 뜬 다이치와는 저번에 만났을 때부터 나이 얘기를 많이 입에 올리게 되는 느낌이었다.
 
"응, 치카라? 아직 이쪽에 있어? 타케다 선생님한테 연락, ……그래, 그 일로. 다들…"
니시노야의 목소리가 웬일로 작았다.

"그쪽은 해외에 있잖아."
"…잖아. 일단 전해는 두는 게…"
"…서 많이 놀랄텐데."
멀어서 잘 들리지 않는 이쪽도 배구부 후배들의 목소리다. 스가와라는 눈을 떴다.

"스가, 좀 괜찮아?"

기대있던 든든한 것의 정체는 아즈마네 아사히의 어깨였다. 검었다. 스가와라의 어깨가 검듯이.

"…구나 역시."
"그렇지. 각자 일이 바쁘고. 앞으로는 이런 일로 만나는 경우가 그냥 와~ 하고 만나서 술 마시는 일보다 더 많아질 거야. 장례식이거나, 아니면 결혼식이거나."
"그래서 어른들이 그렇게 와서들 술을 마시나."

후배들의 목소리가 귀에 또렷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다면 누구의 할머니 할아버지나 부모님의 장례식일 거라고 생각했지,"
키요코 씨일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스가와라에겐 타나카가 삼킨 그 뒷말이 확실히 들리는 듯 했다. 그 말이 맞다. 스가와라 역시 시미즈의 결혼식에 대해 들을까 두려워했지, 장례식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입술이 저렸다. 분향을 마친 그를 보고 다이치가 "얼굴 너무 하얗다, 스가." 라며 오지랖을 부려 아사히에게 기대있었던 것인데, 눈 뜨고 고개를 가누는 스가와라를 본 아사히는 기대기 전보다 더 겁먹은 얼굴이 되어 팔을 잡아왔다.

"아냐. 나 요즘 회사도 바빴었고… 안좋은 게 한번에 몰려온 거겠지."
"응. 이따가 정좌하고 있어야 하니까 지금 좀 릴랙스해둬."

어른이 된 아사히는 여전히 섬세하고 다정했지만 한결 편안해 보이게 되었다. 사춘기의 하고많은 고민같은 것은 자라서 상황이 바뀌고 나면 먼 일이 되어버리게 마련이니까.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지. 사춘기의 고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계속 아름다운 채로 있었어야 했을 것을 질질 끌고, 혼자서 짓씹어 퇴색시키다가 결국 맞이한 끝이 이거다.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실연에 이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결별. 그녀를 처음 만난 고등학교 1학년 때로부터 이제 10년이 다 되었는데 그 안의 그녀는 아직도 시퍼렇게 날이 서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조차 더 예리해져 간다. 더는 이 세상에 없다고 하는데도. 조의를 표하는 동안, 그는 내내 영정사진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스가. 나 저쪽에서,"
"응."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애를 만났어. 여자애."
"여자?"
"시미즈랑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대. 시미즈네 가족한테서 연락을 받고 왔나봐. 걔는 어제 밤샘에도 있었대."

스가와라가 아사히를 올려보며 눈을 맞추자 키가 큰 친구는 다시 따스한 눈웃음을 보내왔다. 아사히는 치바인지 요시다인지 결혼해서 성이 바뀌었다는 그 동창에 대해 설명해줬지만 스가와라는 다른 생각을 했다. 특징을 들어도 잘 기억이 나질않는 그 동창생은 학교 때 시미즈와 친하게 지냈었나 보구나, 하는. 그냥 고교 때 부활동 동료에 동성친구도 아닌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부고를 전해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뿐이고, 어쩌면 장례식에 찾아올 수도 있을, 남에 불과했다. 그녀를 떠나보내는 의식에서 밤새 빈소를 지키고 있을 수도 없고 가족들이 하듯이 마지막으로 고인에게 인사를 할 수도 없다. 시신이 된 그녀조차 그는 볼 자격이 없다.

"아즈마네 군, 스가와라 군."

이름을 불러오는 소리에 몸을 돌리자 익숙한 모습이 있었다.

"타케다 선생님."
"스가와라 군은 오랜만이네. 다들 오는 동안 별일없었죠?"
"네."

시미즈와 함께 부활동을 했던 배구부 OB에게 연락을 돌린 것은 사와무라 다이치였다. 다이치가 제일 먼저 연락한 것은 같은 학년에 부주장이었던 친구 스가와라지만, 그 다이치에게 소식을 알린 것이 바로 그들이 3학년일 때 배구부 고문을 맡았던 타케다 선생님이었다. 타케다 선생님이 시미즈와 같은 학년에 주장이었던 사와무라쪽으로 우선 연락을 준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타케다 선생님은… 시미즈의 가족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시미즈가 남긴 주소록에 선생님의 연락처가 있었기 때문에.
스가와라는 그것도 싫었다.
일어서서 선생님과 악수하는 아사히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같은 건 없었다.

"다들 정말 어른이 되었네요. 원래도 모두 키는 컸지만."

배구부니까, 하며 웃음을 머금는 그 얼굴은 마냥 온화해보였다. 슬픔 가운데서도 안정적인 그 온화함이 존경스러울 정도라고 생각하던 중에 선생님의 표정이 갑자기 흔들려 스가와라는 놀라고 말았다.
다 함께 시선을 내려보니, 타케다 선생님이 서있는 툇마루에 작은 손이 올라와 있었다. 다른 한 손은 선생님의 발목께를 잡고있고, 작은 얼굴이 이쪽을 올려본다. 마당 아래 서 있는,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아저씨- 아저씨이-"
"아아, 히로?
이쪽은 이 댁 손자로, 시미즈 씨의 친척인 히로토 군이라고 해요. 아까 잠시 내 말동무를 해주어서… 무슨 일인가요?"

짧은 소개를 마치고 선생님은 꽤 개구쟁이같아 보이는 아이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그 아이는 그 색의 의미를 아직 가슴 깊이 실감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친척일 뿐인 시미즈의 일에 별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일까. 아니, 생각해보면 저 아이를 포함해 시미즈의 큰아버지 댁이라는 이 집에서 지금 손님을 맞으며 바삐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본인이 '시미즈'다. 같은 이름이지만, 이제 이름도 필요없어진 그녀를 위해 그 작은 아이가 무얼 더 해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이는 선생님을 마당 한쪽으로 데려가더니 나무 아래에서 자신보다 훨씬 더 작은 아이 하나를 끌어냈다. 그 애도 역시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 곳에 아이가 있는 줄도 몰랐던 스가와라는 조금 놀랐다.
나무 그늘에서 빠져나온 어린 여자아이는 조금 불안해보였다. 모르는 어른이 우글거리는 집이 불편했던 것일까. 이쪽을 흘깃 보는 여자아이의 시선이 어쩐지 묘했다. 이상한 구석은 전혀 없지만, 뭔가 섬칫한 데가 있다고 해야할까. 아이답지만 어딘지 아이답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타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여자아이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꼬마들과 함께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며, 타케다 선생님은 스가와라와 아사히를 향해 곤란한 듯한 미소를 던졌다. 곁에 있는 아사히는 분위기가 무거운 상갓집 안을 제 맘대로 누비고 다니는 아이들 덕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는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아사히, 표정 풀어졌다. 애가 무서워하잖아."

아사히는 윽, 하며 민망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콕 찔러오는 그 장난스러운 말에 평소와 같은 스가와라를 느끼고 내심 안심한 것 같았다. 스가와라도 선생님의 검은 뒷모습을 보며 자세를 편히 했다.
잠시 후 법사를 마친 일행은 다이치가 운전하는 차에 신세를 지기로 하고 차내를 우글우글하게 매운 채 상갓집을 뒤로 했다. 좀 맑아진 머리가 되어 주변을 둘러 보니, 그 동네는 카라스노 고등학교가 자리한 곳에서는 좀 떨어진 위치였다. 고등학생 때 알던 시미즈의 집과는 완전히 다른 구였지만 사회인이 되어 생활권이 넓어진 지금에 와서 보면 지척인 거리라, 이렇게 가까이에 그녀의 단서가 있었다는 사실에 스가와라는 허탈하다 못해 시원하다 싶어졌다.

그리고 시원해진 만큼 허해지기도 했던 것인지, 스가와라는 아침에 눈물을 흘리면서 잠을 깼다. 짐작가는 구석은 하나밖에 없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자 손끝에 젖은 베개가 닿아 스가와라는 진저리를 쳤다. 무릎을 모으고 얼굴을 묻었다. 머리를 감싸쥐었다.
왜 울었을까. 꿈을 꿨을지도 모르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눈을 뜬 세상에 시미즈 키요코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서 울며 일어난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잠을 못자는 나날이 길어져서, 그는 잠시 자취방을 비우고 집에 가있기로 결정했다. 며칠 집에 있으며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면 나아지겠지 싶었다. 예전, 반쯤 동거에 가깝게 생활하던 그녀가 사라졌을 때 그는 잠시동안 완전히 망가졌었지만 정신을 차린 뒤에는 전보다 더 기합을 넣어 움직였다. 비참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 더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쌓아간 일상을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한 본가 행이었는데… 의외의 방향에서 실마리는 튀어 나왔다.


"코우시, 뭔가 와있어. 너 올 걸 알았나?"

집에 들어서자마자 건네받은 것은 요즘은 보기 드물게 된, 겉봉의 주소가 손글씨로 씌여진 편지였다. 늘 청구서나 전단지 뿐인 자취집 우편함의 사정을 새삼 생각하며 스가와라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매일 거기서 잠 들던 집의 자기 방에 짐을 내려놓고, 알 수 없는 편지를 살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없고, 주소는… 이 근처 다른 동네 어딘가지만, 기억에는 없는 곳이었다. 대체 뭔가 싶어서 봉투를 뜯었다.
어쩐지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두껍다 했는데,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소인이 찍혀있지 않은 또다른 봉투였다. 겉을 살펴본 스가와라는 표정을 굳혔다.

「스가와라 코우시 님께」

그가 아는 글씨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공식전 경기 기록과 연습계획표와 '남자 배구부' 노트에서 늘 보던, 그가 아주 잘 아는 그 필체.
…그녀가 쓴 것일까. 눈 앞이 뜨거워지며 숨이 막혀왔다. 그녀의 필체로 쓰인 자신의 이름을 쓸어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만지고 싶지 않았다. 편지 내용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이런 것이, 지금 와서. 편지를 내려놓고 잠시 진정한 그는 다시 손을 뻗어 봉투를 열었다. 호기심과 연모가 망설임을 이겼다. 안에서 접혀있는 종이를 꺼냈다. 편지지를 펼쳤다. 그 위에 가득한 것도 역시 눈에 익은 그녀의, 시미즈 키요코의 글씨였다.

「스가와라,

병원에서 나는 앞으로 오래살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들었어. 나도 슬슬 그렇게 느끼기 시작했고. 그래서 내가 세상에 없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 몇 마디를 전해두고 싶어.」

인사고 안부고 없이 거두절미 본론부터 쓰여진 것이 과연 그녀가 쓴 편지답다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내용은 계속 이어졌다.

「말도 없이 갑자기 이사하고 연락을 완전히 끊었던 것 정말로 미안해. 스가와라가 그때 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어떤 경우라 해도 사죄하고 싶은 내 마음은 다르지 않을 거야. 받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아. 그저 전해볼 뿐.
나는 그때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지금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 때의 내가 자리잡고 있던 모든 터전을 한번에 버린다는 당시의 선택을 바꾸지 않을 거야. 그 선택 덕분에 나에게는 아주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들을 요 몇년 동안에 현실로 일궈낼 수 있었거든.
반성도 하지 않는 주제에 이렇게 내 욕심만으로 밀어붙이는 사죄의 글을 보내는 것도 미안해. 하지만 막상 죽게 된다고 생각하니 나한테 떠오르는 건 이것밖에 없었어.

항상 다정하고 남을 생각해주던 스가와라에게 걱정끼친 것
스가와라와 함께 있는 동안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것

결국 사람이 하는 후회란 건 다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고, 남기기로 했어. 그리고 내가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제일 든든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야.
그 후회를 빼고 본다면 나는 이 몇 해를 아주 행복하게 살아왔어. 앞으로 얼마나 더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내 현재의 행복은 전부 스가와라와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그 몇달의 시간 덕분이야. 나에게는 아까울 정도로 커다란 사랑을 스가와라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해.
네가 그때 준 잠깐의 기쁨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나를 지탱해주고 있어. 그러니까 나를 걱정하지 말고 이렇게 된 게 안됐다고 생각하지도 마. 이미 안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아주 잘하고 있는 거야.
그저 우리는 줄곧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고, 그 중 어느 때에는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것 뿐.  」

"말도 안돼…"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한숨같은 말을 흘렸다. 사랑, 이라는 글자가 어쩐지 다른 글자보다 크게 보였다. 눈에 고인 눈물때문일까. 그 표현에 매달리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그의 마음을, 알았었다고.

"…치사해."

이건 누가 봐도 치사했다. 이제는 항의도 증오도 키스도 받아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이런 걸 전해오다니. 30년도 못채우고 끝나버린 그녀의 삶을, 그녀를 생각한 그의 마음을, 이런 쓸쓸한 글 한 줄로 치워버리려 하다니.

「그저 우리는 줄곧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고, 그 중 어느 때에는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것 뿐」

편지 말미에는 반년 전의 날짜와 함께 '시미즈 키요코 드림' 이라고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최대한 반듯하게 적은 듯 느껴지는 그 글씨가, 힘을 넣어 등을 곧게 편 그녀로 보였다.


그리고 얼마 뒤, 스가와라는 편지 겉봉투에 적힌 주소를 찾았다. 역시나 그 주소는 시미즈의 장례식 때 찾아갔던, 그 마당이 있는 큰 집이었다. 시미즈 키요코의 백부가 아들손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또다른 시미즈 가家.
미리 전화로 연락했을 때도 그랬지만 대응해준 것은 그보다 손위뻘로 생각되는 젊은 여자였다. 처음엔 시미즈의 사촌인가 생각했지만 정확히는 사촌오빠의 부인 즉 사촌 올케였다. 여자가 안내하는 대로 거실 탁자 앞에 앉은 스가와라는 조금 초조했다. 낮 시간이라고는 해도 젊은 부인과 아이들뿐인 집에 과년한 남자가 혼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예 서슬이 시퍼런 백부님과 단 둘이 마주 앉게 되는 시뮬레이션은 가능했지만, 실전에서는 문틈으로 전해지는 어린이 프로그램 소리를 들으며 그녀와는 피도 섞이지 않은 사이인 사촌 올케에게 그녀 이야기를 묻게 되었다.
집주인의 어깨 너머로 벽면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니 그 기대했던 백부님도 별로 호랑이같은 아저씨는 아닌 듯했다. 말수가 적을 것 같은 차분해보이는 중년 남자와 그를 닮은 젊은 아들, 지금보다 약간 어려보이는 눈 앞의 부인, 장난꾸러기처럼 모자를 돌려 쓴 남아옷을 입은 아기의 네 가족이었다. 백모는 원래 안계시는 듯 했다. 그래서 며느리가 안주인으로서 그를 응대하는 건가,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시미즈… 아니, 키요코 씨의 편지 때문에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통성명은 전화로 또 방금 현관에서도 했고, 탁자에 다과를 차리고 착석한 집주인에게 스가와라는 본론을 꺼냈다. 받았던 편지도 꺼내놓았다. 집주인은 편지에 시선을 주더니 입을 열었다.

"네. 키요코가 맡긴 편지 맞아요. 직장 쪽은 투병을 시작할 때 정리했어서 유언이라 할만한 것도 그것밖에는 없었고."

올케라는 입장에서 예상한 것과 달리, 집주인은 시미즈를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둘은 나이도 가깝고 교류가 잦아서 자매처럼 지내고 있었던 모양으로, 독신인 그녀가 병상에 눕자 이것저것 살피고 도움을 준 것도 이 부인이었다고 한다.
키요코의 병이 발견된 것은 1년쯤 전이었다. 젊은 나이인지라 건강을 의심한 적이 없던 그녀의 상태는 이미 중증 그 이상이었다. 이웃 현에서 자리잡고 든든한 직장을 얻었던 그녀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6개월 전부터 급격히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내가 보러 갔을 때였어요. 병실에서 침대도 아닌 의자에 멀쩡히 앉아있다가…"

말을 잇던 집주인의 목소리에 서서히 물기가 배어나왔다. 스가와라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렇게 갑자기 갈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그 전 주까지만 해도 치료 경과가 아주 좋게 나왔거든요. 나는 계속, 젊으니까 당연히 잘 나을 거라고만…"

이 역시 장례식에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이렇게 젊은데, 젊은 사람이 어쩌다 그런 병이, 젊으니까 병이라곤 미리 생각을 못하고, 젊으니까 진행도 빨리, 아직 젊은데 왜… 그녀의 젊음도 그에 대한 안타까움도 그저 돌림노래처럼 공허하게 상갓집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시미즈…아니, 키요코 씨가 편지 외에 따로 부탁한 일은 혹시 없습니까."

편지는 사후에 발견되었고, 조문객 명단의 카라스노고교 남자배구부 동료 가운데서 편지봉투에 써있던 스가와라의 이름을 우연히 찾은 덕에 부쳐질 수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연락처를 가지고 있던 타케다 선생님께 문의해, 편지를 선생님이 알고있던 그의 본가주소로 보냈다.
그렇게 그녀의 편지를 전해준 장본인이기도 한 시미즈의 올케와 말을 나누며, 스가와라는 키요코라는 이름을 그녀를 눈앞에 두고 있던 시절보다 훨씬 더 많이 부른 듯 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물론 그 가족들도 이름은 전부 시미즈이고, 고등학교 때 같은 동아리였을 뿐인 그가 유족 앞에서 그녀를 언급하기에는 키요코 씨라는 호칭이 제일 적절하다.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어딘지 싫은 일이기도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대화 또한 스가와라가 원하는 내용은 건드리지 못한 채 헛바퀴만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원래 순간의 통찰이나 동물적인 직감보다는 사소하지만 확실한 현상의 반복으로부터 눈치를 채는 일에 더 소질이 있는 그였다. 뭔가가 더 있다는 얄팍한 예감은 물론 그 편지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분명 그녀의 필체가 맞고, 그녀답다면 그녀다운 문장이다. 하지만 그녀는, 시미즈는, 키요코는, 원래부터 애매한 말은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추상적인 것을 논하더라도 늘 골자가 있었고 하나마나한 소리를 할 바에야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지막 의지인 그 편지는 어째서 그렇게 에두르는 표현이 많은 것인지. 그는 의문을 가졌다. 그렇게, 그때, 그, 그런, 요 몇년 간. 확실한 시점의 지정도, 행동의 세부도 밝히지 않은 그 문장들은 그 자체뿐만 아니라 행간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숨기고 있는 상대는 편지의 수신인인 그인가, 아니면 혹시 그녀가 죽고 난 후 그녀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신인보다 먼저 편지에 손을 댈 수도 있는 누군가인가? 그녀는 무엇을 숨기려 했고 숨기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보호하려 한 것인가? 편지를 품에 안은 뒤 이제 울며 잠을 깨지는 않게 된 그는, 그 마지막 한 가지가 절실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떤 사실이든간에.

집주인은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렇다. 대화의 소재는 이미 떨어졌고 그가 꼬치꼬치 캐묻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을, 스가와라는 몇년 전에도 많이 겪어봤다. 행방이 묘연해진 그녀를 찾아 헤맬 때에. 그녀를 조금 알고, 그에게는 완벽히 낯설었던 사람들을 끝없이 대면하며 느꼈던 서먹함이었다.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 그녀와의 일을 말로 꺼내고 더 상처받을까봐 자세한 사정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던 자신. 그 때 경험했던 막다른 절망의 냄새가 코 끝에 맴돌았다.
부인도 이렇게 자리가 길어지리라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편지를 받은 인연으로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그녀에게 알려진 키요코와 그의 관계는 그저 고교 동창생일뿐이다. 그는 아주 약간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 자리의 대화가 점점 끊겨감에 따라 건너편 방 안에서 아이가 칭얼대는 듯한 소리가 커져가는 느낌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폭발할 줄은 몰랐다. 문짝에서 다시 작은 펑, 소리가 들리더니 저절로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나던 텔레비전 소리는 어느새 그쳐있었다. 문이 열리며 보인 것은 까치발로 문고리를 잡으며 나타난 작은 여자아이와 그 뒤로 빼꼼 고개를 내민 남자아이, 장례식 때 타케다 선생님에게 붙었던 그 개구쟁이 남매였다.

"사에…히로! 엄마가 말했지요, 지금 손님이 오셨다고. 손님이랑 얘기 중인걸. 방해하면 싫어요."

스가와라가 온지도 30분 이상, 아이들은 방안에 갖혀 텔레비전 보는데에 질려버린 모양이었다. 남자아이 뒤쪽에서 아이들 머리만한 고무공이 맑은 소리를 내며 통통, 튀어오르고 있었다. 문짝에 충돌해 큰 소리를 낸 원인은 아마 그 공인듯 했다.

"자, 사사에. 들어가 있자. 히로토도 얼른!"

하는 엄마의 으름장에도 아랑곳않고 남자아이는

"이제 숨바꼭질 할거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거실을 가로질러 마당으로 쏙 달려나갔다. 양말도 신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는 살짝 얼이 빠져버렸다. 집주인은 한숨을 쉬더니 스가와라에게 양해를 구하곤 아이를 쫓아 툇마루로 연결된 거실의 전면창으로 나가버렸다.
아이가 있는 집은 역시 여러모로 피곤하구나 생각하며 그가 몸을 돌려 차려진 다과에 시선을 주었을 때,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

저기요, 도 그런데요, 도 아닌, 말이 되지 못한 한 조각의 웅얼거림. 가늘지만 또렷한 '소리'로 말을 걸어온 건, 더 어린 쪽의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오빠를 따라 달려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스가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특별할 것도 없고 시선이 강한 것도 아닌 그 아이의 눈이, 스가와라에게는 이번에도 엄청나게 이질적으로 느껴져 왔다.

"편지에 뭐라고 돼있었어요?"

스가와라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아이에게 대답할 기회를 놓쳤다. 잠시 후 머릿속에서 조합된 소리들이 이해되었다. 이 아이는… 아이는 지금 눈앞의 낮은 탁자 위에 놓여진 키요코의 편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걸 받은 사람이 그라는 것도. '하지만 어떻게?'

"엄마가, 나한테 맡긴다 그랬어요. 그치만 진짜 내께 아니니까, 속은 알면 안되는 거라서,"

그래서 내용은 모른 채로 외숙모에게 부탁했다, 고 아이가 말했다.
선명하지만 부정확한 발음과 자기 시점뿐인 말투, 모르는 어른에게 보일 법한 아이다운 낯가림. 모든 것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스가와라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니까, 아이는 편지의 내용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받는 사람, 받은 사람 본인인 스가와라에게 그것을 묻는다. 자기가 훔쳐 보는 것은 매너 위반이니까 편지를 가지고 있을 때는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편지를 받은 당사자인 그를 만나자 직접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질문해온 것이다.
이렇게 작은 아이여도 남과 자신의 의사를 파악하고 존중하고 표현하는 또렷한 한 사람이라는 것에 스가와라는 경탄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시미즈- 키요코가 편지를 맡긴, 누구보다도 든든하고 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썼던 인물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똑바로 마주친 아이의 눈이 여전히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침에 세수를 하다 고개를 들면 거울 속에 있는, 늦은 퇴근길에 올랐을 때 어둠에 실려 차창 위로 떠오르는, 고향집 할머니의 장식장 위 고이 놓인 액자 속에서 어린 모습으로 웃고 있는… 그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눈이, 혼자 살아나 자기만의 시선을 이쪽으로 꽂아오는 것 같았기에.
그는 생각했다. '나랑 똑같구나.'

별 것 아닌 작은 사실들로 이루어진 퍼즐조각이, 모두 모여 하나의 그림이 된다. 날카로운 본능이나 번뜩이는 직관은 여전히 스가와라 안에 없었지만 지금 모인 것들만으로 그는 확신하게 되었다. 전부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이해해 줄 수는 없었지만…. 떠난 키요코도, 히로토의 엄마도, 눈 앞의 작은 아이도, 시미즈 씨 세 사람이 그에게 무엇을 말하고 또 말하지 않았는지를 그는 이제 알았다.

「나를 지탱해주고支えて 있어」

"…사사에支, 안녕.
난 코우시孝支라고 해."

 

'2차 > HQ'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자들  (0) 2016.11.08
먼저 빛나고 뒤이어 무너지는 것 (전체 공개)  (0) 2016.11.08
cherie  (0) 2016.11.08
기개없는 녀석의 수단  (0) 2016.11.08
I wish you a happy day  (0) 2016.11.08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6/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